국내 몇 대 갑부에 들 만큼 잘 산 건 아니었다. 하지만 돈이 부족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사뒀던 땅값이 폭등한 덕분에 부자가 된 케이스였고, 그 돈으로 사업을 시작했는데 대박이 났다.'어릴 적부터 사달라는 거 다 사주고, 돈 달라는 대로 주는 아버지 덕분에 부족함이 없는 생활을 해왔다.'고등학교는 한국에서 다니고 있지만 졸업하는 대로 미국에 유학을 갈 예정이었다. 거기서 공부를 마치고 박사 학위까지 딴 후에 한국에 돌아와 대기업에 취직. 그것이 우린의 인생 목표였다.'잘 된다면 미국에서 매너 좋은 남자를 만나 신랑으로 삼고 싶기도 했다. 이왕이면 금발에 하얀 피부를 가진, 키가 큰 남자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아버지가 일 때문에 지방에 내려갔다가 올라오시는 길에 교통사고로 사망을 했다. 상대방의 부주의였다.'그 소식을 들었을 땐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슬프기는 했지만 앞길이 막막하지는 않았다. 듬직한 아버지가 이제는 세상에 없다는 사실에 울고불고 오열을 하다가 기절까지 했지만 그뿐이었다.'아버지가 남기고 간 유산과 보험금이 있으면 엄마와 둘이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그 돈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부끄럽지 않은 당당한 딸이 되면 되는 거니까.'하지만 아버지 장례식이 끝나고 일주일도 되지 않아 그 일이 벌어졌을 땐, 그야 말로 앞이 캄캄. 어둠에 휩싸였다.'부도.'남의 일인 줄만 알았던 그것이 아버지에게 일어났었단다. 그걸 막기 위해 사채를 끌어다가 썼다고 했다. 2억 빌린 돈이 어느새 불고 불어 두 배가 되었고, 사채업자들이 집으로 들이닥쳤다.'사채를 빌려 썼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사채의 무서움보다는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이 더 컸다. 가족들에게 걱정을 시키지 않으려고 동분서주하다가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니, 아버지가 돈 때문에 힘들다는 것도 모르고 옷 사달라고 조르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슬퍼졌다. 그래서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죄송하다고, 죄송하다고 울면서 말했다. 그건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하지만 사채업자들은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들은 틈을 주지 않고 우린과 어머니를 몰아붙였다. 그들의 행동력에 휘말리자 아버지를 잃은 슬픔보다 사채업자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커졌다.'그들은 무자비하고 잔혹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와 협박을 해대는 그들 때문에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피폐해졌다. 아버지를 추억할 여유는 사라졌다.'집을 빼앗기고 가구도 다 빼앗겼다. 아버지의 보험금까지 싹 다 긁어갔는데도 빚이 남았다고 했다.'“몸이라도 팔지 그래? 요샌 어린것들이 더 인기거든.”'“너 정도 나이면 어린것도 아니야.”'“좋은 곳 소개시켜 줄까? 1년이면 빚도 다 갚고 예전의 집도 찾을 수 있을걸.”'사채업자들은 파충류 같은 눈에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들이 축축한 시선으로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몸이 더럽혀진 느낌이 들었다.'“갚을 거예요!”'아는 사람을 통해 간신히 구한 지하 단칸방.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협박을 해대는 그들에게 우린은 악을 썼다.'“내가 돈 벌어서 다 갚을 테니까 제발 우리 좀 가만 내버려둬요!”'그들은 우린의 말을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오히려 명함 하나를 던져주며,'“생각이 바뀌면 연락해라. 돈 많이 주는 곳으로 보내줄 테니까. 몸은 좀 힘들겠지만 말이야.”'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아, 더러운 웃음소리도. 그들이 떠난 후, 어머니가 쓰러졌다.'충격 때문이었다. 평생 고생을 모르고 공주님처럼 살아온 어머니는 아버지가 남기고 간 역경을 견뎌낼 힘이 없었다. 병실 침대에 누워 눈을 뜨지 못하고 간신히 호흡만 하는 어머니를 보며 우린은 결심했다.'‘뭐든 할 거야. 우리 집, 다시 일으켜 세울 거야. 우리 엄마를 따뜻한 방에 눕힐 수만 있다면 난 뭐든 할 수 있어!’'자신도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았는지 알 수 없었다. 공주님처럼 지내온 건 우린도 마찬가지였다. 돈도 많고 친구도 많고. 힘든 일에 처해 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그래서 못 견딜 줄 알았다. 아버지가 사채를 썼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래서 사채업자들이 찾아왔을 때. 우린은 자기가 견디지 못하고 쓰러질 줄 알았다. 힘들어서 차라리 죽음을 결심하는 사람들처럼 행동하게 될 줄 알았다.'하지만 아니었다. 절대로 죽고 싶지는 않았다.'‘난 아직 앞날이 창창해! 내가 이대로 죽으면 우리 아버지, 편하게 눈을 감을 수 없으셔. 난 어떻게든 살아갈 거야.’'하지만 우린은 아직 미성년자. 미성년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많지 않았다. 시급 3천원을 간신히 넘는 일로는 그 돈의 이자조차 갚을 수 없었다.'‘한 번에 많은 돈을 벌어야 할 텐데……. 자꾸 시간을 끌면 이자가 더 불어나서 결국…….’'우린은 머리를 흔들어 끔찍한 생각을 털어냈다.'초조했지만 사채업자들이 말한 그 일만큼은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 어리긴 해도 그 일을 선택하면 얼마나 몹쓸 짓을 많이 당하는지 모를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그러던 중에 그 광고를 발견했다.'[숙식 제공. 가정부 하실 아주머니 구함. 나이 40살 이상이신 분. 월 600만원.]'월 600만원. 엄청난 돈이다. 하루 종일 알바를 해도 못 만져볼 돈.'“보통 가정부한테 월 600만원이나 주던가?”'좀 의아하긴 했지만 월 600만원의 유혹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일단 가보고 이상한 곳이면 도망치면 되는 거다. 만약 정말 집안일만 해도 되는 거라면…….'‘그것도 문제야. 난 집안일 같은 거 해본 적 한 번도 없는데……. 에이, 뭐 어떻게든 되겠지.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잖아? 남들이 다 하는 집안일, 나라고 못하겠어? 할 수 있어. 우리 엄마, 다시 편하게 살아야 돼. 보일러도 안 돌아가는 지하 단칸방에서 벗어나야 돼. 학교도 나중에 검정고시를 치르면 되지. 지금 학교가 문제야?’'수화기 저편의 목소리는 말했다.'[그럼 내일 와 보세요.]'시간과 주소를 말해 준 목소리는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가정부를 하게 될 집은 예전에 우린이 살던 집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아마도 꽤 잘 사는 사람인 모양이다. 그 동네는 땅값이 비싸니까.'우린은 병원으로 돌아와 엄마의 손을 꼭 잡았다. 엄마는 잠들어 있었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30대 중반으로 보일 만큼 예뻤던 엄마는 그사이에 많이 늙었다. 눈 밑에 검은 다크서클과 주름살, 파리해진 얼굴을 보자 왈칵 울음이 나오려고 했다.'하지만 지금은 울 때가 아니다. 벌써부터 약해지면 안 된다. 앞으로 더 험한 일들이 많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엄마. 걱정하지 마. 내가 꼭 엄마를 편하게 해줄게. 그러니까 얼른 기운 차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