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바다의 모진 풍랑을 맞아서인가. 푸른 소나무의 등줄기가 유난히 굽어 있다. 그 굽은 등이 어디 하나뿐이겠는가. 굽이굽이 물줄기 돌아 흐르는 계곡의 물처럼 해송은 굽고 굽고 또 굽어 있었다.'칠보산의 끝자락, 힘겹게 짠내 가득한 바람에도 꿋꿋하게 푸르름을 풍기는, 몸이 휠지언정 꺾이거나 굽히지 않는 작은 해송들을 바라보면서 준은 하염없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붉은 띠를 두른 형상을 한 암벽으로 둘러싸인 석대봉에서 깔리는 한숨은 파도 소리와 함께 한양의 정반대 방향으로 흘렀다.'“오는 길이 멀고 험했을 터인데, 이리 와주어 무척 기쁘이.”'“귀성군마마 홀로 이 먼 영해 도독에 떠나보내고 신, 그간 네 해 동안 단 하루도 편히 잠을 이룬 적이 없사옵니다.”'“이 사람, 치율. 그냥 벗으로 대하게나. 자네 말마따나 이 머나먼 유배지에서 내, 무슨 대접을 바라겠는가. 그저 뜻을 함께했던 벗으로만 바라보시게나. 군이니 마마니 다 신물이 나려 해.”'너무나 외진 곳, 더욱이 인적도 드문 곳에 유배되어 감시를 하는 나장들도 잦으면 이레에 한 번, 어쩔 때는 달포에 한 번씩 올라와 그의 모습만 확인하고 갈 뿐이었다. 이제는 너무도 익숙해져버린 유배지에서의 생활에 준은 자신의 뜻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잊고 살아가고 있던 모양이었다.'“끝까지 지켜주지 못해 미안허이, 귀성군.”'“어허, 그러지 말라니까.”'“그래, 준. 걱정을 많이 하였는데, 이런 말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치율은 준의 모습을 조심스레 훑어보았다. 어째, 죄인의 몸으로 멀리 홀로 유배된 사람치고는 이전보다 훨씬 살이 오르고 혈색도 진해 보였다. 하지만 치율은 차마 그렇게까지 말할 수가 없었다. 그저 머쓱한 웃음으로 네 해 동안의 그리웠던 벗을 마주하는 것으로 대신 할 수밖에.'“내가 너무 나태해진 모양이야. 몸이 얼마나 불었는지 숨을 쉴 때마다 괴로워. 그 말이 하고 싶었던 게지?”'“후훗, 한양서의 생활은 걱정, 근심의 나날이었는가 보이. 그 모든 것을 버리고 나니 마음이 너그러워진 게지. 보기 좋아. 전보다 훨씬 후덕한 인상일세.”'“허허, 이 사람아. 저 파도에도 귀가 있다네. 후덕하다니, 그런 말은 날 향해 입에 올리지도 마. 우리가 왜 이렇게 됐는지 잘 알지 않는가."'조정은 이미 원상의 손에 놀아나고 있었다. 아니, 한명회의 세상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가 눈에 담으면 곧장 조정의 일을 맡게 되고, 그의 눈 밖에 나면 곧장 조정에서 내쳐지는, 심지어 부지불식간에 목숨까지 잃게 되는 일이 허다했으니 절대 과대평가를 하거나 모략은 아니었다.'“그토록 믿음에서 배신을 당하였으니 자네 인복도 참 박복하구려.”'“그리 생각하지 않네. 그래도 아직 내게는 이리 먼 곳까지 달려와 주는 이들이 있으니 말일세.”'“이들? 나 말고 또 누가 오는가?”'준은 다시 뒷짐을 진 채로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거침없는 파도가 산을 금방이라도 깎아 내릴 것처럼 세차게 들이닥쳤지만 어디 가당키나 하겠는가. 꿈쩍도 하지 않는 산을 이룬 든든한 바위는 묵묵히 파도를 맞고만 있을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