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이른 봄의 저녁노을이 브래들리 본사의 최상층에 위치한 사무실로 스며들고 있었다. 고층빌딩이 늘어선 뉴욕에서 아무런 방해물 없이 지는 태양빛을 흡수할 만큼 위로 높이 솟아 있다는 사실이 증명하듯, 사무실 안은 충분히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맞춤 제작된 가구들이 사무실을 채우고 있었고 책상위에 놓여 있는 집기들에는 주인의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다. 그렇듯 모든 집기와 가구들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사무실에서 서류 보관함이라기보다는 금고에 가까워 보이는 물건 하나만이 이질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열쇠를 넣어야 하는 자물쇠와 돌려서 번호를 입력해야 하는 자물쇠가 두 개나 달려 있는 걸 보면 꽤나 중요한 물건을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금고는 마호가니 색상으로 꾸며진 사무실에서 유일하게 차가운 은색을 띄고 있었다. 그리고 방안의 모든 사물에 공평하게 저녁놀을 던지고 있는 창가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서있는 자세를 보면 술에 취한 것 같지는 않은데 무슨 생각에 골똘히 빠져 있는지 그의 손에 술잔이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젠장!”'외마디 말을 뱉어낸 남자는 빙글 뒤로 돌아, 문제의 금고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그러다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다시 책상 쪽으로 향해 비서를 호출했다.'“열쇠 가지고 당장 방으로 오게.”'그리고는 금고 쪽으로 다가가 금고의 문에 이마를 대고 주저앉았다. 차가운 금속이 마음을 식혀주어 후회할 일을 저지르지 않도록 얼른 그 자신을 안정시켜 주었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리라. '상사의 지시대로 열쇠를 가지고 사무실에 들어온 에릭 벡스터는 말을 걸지도 움직이지도 못한 채, 그저 지시를 기다리며 문가에 서 있었다. 세상에는 건들어서는 안 될, 넘어서는 안 될 선이 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상사, 제이슨 브래들리를 방해하는 것이야말로 그 리스트 중 첫 번째에 올라갈 것이다. 전대 회장의 죽음으로 자리를 물려받은 그는 취임 후 미친 듯이 오르락내리락 하던 주가와 그것보다 더 방정맞게 흔들리던 이사진을 한 달여 만에 안정시키며 재계의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다. 그가 이 회사에 발을 들여놓던 순간부터 보좌했던 자신은 회장 자리에 오르기도 전부터 전대 회장의 업무 중 7할 정도는 자신의 상사가 처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런 결과가 너무도 뻔해 보였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저 다크호스로 보였을 것이다. 냉철한 판단력과 놀라운 직관력, 서른이 넘지 않는 나이란 것을 믿을 수 없도록 하는 노련한 경영 능력. 이제는 세상 사람들도 알고 있는 진실 이외에도 자신은 브래들리 그룹의 현재 회장에 대해 좀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오늘도 지시대로 열쇠를 가지고 방으로 들어서긴 했지만 그가 이 열쇠를 넘겨받아 저 금고를 열 확률은 희박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차라리 그 금고를 열어, 보고 싶은 것을 맘껏 보고 덜 힘들어했으면 하는 바람에 자신은 이 열쇠를 책상 맨 위 서랍 제일 바깥쪽에 넣어 두었다. 열쇠가 필요하다고 말할 때 얼른 달려와 그의 이성이 돌아오기 전에, 또다시 중무장하기 전에 열쇠를 건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번 저 문을 열면 절대 멈추지 못하리란 것을 그도 알고 자신도 알았다. 바로 그것이 자신이 항상 재빨리 이 열쇠를 건네주려 하는 이유이자, 그가 저토록 참아내려 하는 이유인 것이다.'“됐어. 미안하네. 돌아가도 좋아.”'여느 때와 다름없는 상사의 말에 역시나 하며 돌아서는 에릭의 입가로 어쩔 수 없이 조그만 한숨이 나왔다. 에릭이 자리를 떠나고 나서도 제이슨은 금고에 대고 있던 이마를 떼지 않았다. 그리고는 최대한 규칙적으로 심호흡을 했다. 오늘도 참아냈다. 저 서류함을 열면, 모든 서류를 볼 것이다. 어디에 어떻게 살고 있는지, 심지어 그녀가 일주일 전에 장 본 것이 무엇인지까지 적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열 수 없는 것이다. 한 번 저 문을 열어 저 안에 있는 서류들을 보고 나면, 행여 그 안에 그녀의 새로운 남자에 관한 얘기라도 적혀 있다면 자신은 당장 달려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제이슨이 싫다며 떠난 그녀에게 완벽히 미움 받게 될 것이다. 모르는 것이 낫다. 언젠가는, 데이빗이 보고 싶어서라도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안고 이렇게 기다리는 지금이 낫다. 미움 받아도 좋으니 내 곁에 묶어 둘 힘을 키울 수 있을 때까지는 나는 아무 선택도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