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청사 앞에 검은 승용차가 와서 섰다. 경호원이 차 문을 열자 검은색 정장에 검은 모자를 눌러쓰고 커다란 선글라스를 쓴 여자가 차에서 내렸다. 그 뒤를 따라 정 총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 총재가 청사로 발걸음을 옮기자 그녀가 그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랐다. 검은색 일색인 그녀의 모습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차가운 이미지를 드러내고 있었다.'그녀는 정 총재를 보좌하고 있는 여자였다. 검은 모자와 검은 안경이 그녀의 작은 얼굴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어 도무지 나이도, 얼굴의 모양도 가늠할 수 없었다. 누구도 그녀의 얼굴을 본 사람은 없었다. 또한 그녀의 날카로운 언변에 누구도 대항 한 번 하지 못하고 꼬리를 내렸다. 그런 그녀를 정 총재는 꽤 신임했다.'“오늘 스케줄이 어떻게 되지?”'“열두 시에 정일그룹 회장님과 점심 약속이 있습니다. 그 뒤로 국회에서 열리는 청문회에 참석하셔야 합니다.”'“요즈음 조사 중인 검찰 뇌물수수 사건은 어찌 되고 있나?”'“총재님이 알고 계시는 것처럼 아직은 진전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그럼 내일 있을 유세장에서 사용할 대본 좀 볼까?”'“네.”'여자는 정 총재에게 준비한 원고를 내밀었다. 그 원고를 읽던 정 총재의 얼굴에 기쁜 미소가 떠올랐다. '“좋군.”'그의 짧은 말 한마디가 많은 말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여자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원래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항상 말을 아끼고 칭찬에 인색한 사람이었기에 그 한마디는 그의 만족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었다. '“약속 시간에 늦지 않도록 지금 출발하심이 좋을 것 같군요.”'시계 바늘이 11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자 여자가 정 총재에게 말했다.'“흠.”'그는 들여다보던 서류들에서 시선을 떼며 안경을 벗었다. 장시간 글을 들여다보고 있었더니 눈이 피로했다. 그는 손으로 눈을 지그시 눌러 피로를 풀어주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말했다.'“가지.”'“네.”'그녀의 나이 이제 스물네 살. 그녀는 스물두 살의 어린 나이부터 아버지인 정 총재를 따르며 그를 보좌했다. 아버지인 정 총재는 그녀를 무척이나 신임했고, 그녀가 그의 뒤를 이어 우리나라 최초의 여대통령이 되기를 무척 바라고 있었지만, 그녀는 아버지가 살아가고자 하는 세계에 염증을 느껴 특별한 삶보다는 평범한 삶을 원하고 있었다.'‘난 이러다 시집도 가지 못할 거야.’ '동화 속 왕자님을 만나려면 많은 남자를 만나야 하지만, 그녀에게는 그런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내가 처녀귀신으로 늙어 죽길 바라시는 건 아닐 텐데. 조금의 시간이라도 줘야 남자를 만나는 시간도 가질 텐데. 그래야 내 동화 속의 왕자님을 찾아 열렬한 사랑도 해보지. 난 절대로 집안끼리 엮어지는 정략결혼 같은 것은 하지 않을 거야. 로맨스 영화 속의 주인공들처럼 애절하고도 절절한 사랑을 해보고 싶어.’'그녀는 꿈이 많은 소녀였을 때부터 결심했다. 절대로 정략결혼이 아닌 자신이 택한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하지만 요즈음처럼 바쁜 상태라면 자신은 노처녀로 늙어 죽을 확률이 더 높을 것 같았다. '‘일단 아버지를 이 나라의 지도자로 만드는 데 힘쓰고, 그 다음은 기회를 봐서 이곳을 훌훌 떠나 나의 사랑을 찾아봐야지. 분명 어딘가에 나의 사랑이 날 기다리고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