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네 살 때였다고 하는데 기억은 나지 않는다. '젊은 부부가 함께 노점장사를 하다가 집으로 돌아가던 늦은 저녁, 뺑소니차에 치여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고 한다. 다행히 어린 나는 할머니 댁에 하루 맡겨졌던 상태여서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 부모님의 제사상에 네 살의 나는 사과를 집으려고 올라갔던 기억이 난다. 영정 속의 젊은 부부는 행복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그 후로 줄곧 조부모의 집에서 자랐다. 나의 부모는 원래가 가난한 사람들이어서 내게 남겨진 재산도 없었고 조부모에게 남겨준 나의 양육비 같은 건 당연히 없었다. 조부모 또한 하루하루 벌어먹고 사는 처지라 항상 얼굴에 가난에 찌든 어둠을 달고 살았다. '초등학생 때는 가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웃겨드리기도 했으나 중학교에 진학하면서는 오히려 말썽을 피웠다.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담배를 피웠고 조그만 도둑질도 했다. 동급생들이 부모 없는 자식이라고 손가락질을 하면 그 녀석들을 흠씬 두들겨 패주었다. 나보다 덩치가 작거나 약해 보이는 후배들에겐 돈을 뜯기도 했다. '드러나게 말썽을 많이 피우진 않았지만 조부모는 가끔 학교에 모습을 드러내고 담임선생에게 머리 숙여 백배사죄했다. 당신들이 못나 아이가 그렇게 되었다고 깊이 허리 숙였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서는 크게 나를 야단치지 않았다. '중학교 2학년 여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위암이라고 했다. 몇 년을 병을 키워왔는지도 모르게 어느 날 피를 토하고 죽어버렸다. 계속 식사를 못하고 밤에 잠을 못 자서 좀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그냥 노인이라 그런가보다 치부해버렸다. 아무리 힘들어도 눈물을 보이지 않던 할아버지가 할머니의 시체를 앞에 두고 엉엉 아이처럼 울었다. '할아버지의 눈물을 보자 도저히 집에 있을 수가 없어 몇날 며칠을 나와서 돌아가지 않았다.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바람이 들락거렸다. 양아치 녀석들과 아무리 술을 마셔도 그 바람이 잦아들지 않았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갔다.'그때 처음으로 할아버지가 나를 때렸다. 그런데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이불도 덮지 않은 할머니의 앙상한 얼굴이 눈을 감은 채 나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내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방 안에 그대로 모셔두고 있었던 것이다. '할머니의 뼈를 산에 뿌리며 할아버지는 단 한 마디를 했다.'“내가 영원히 산다고 생각하지 마라.”'그 뒤, 나는 아침에 신문배달을 시작했다. 할아버지와의 생활이 적적하고 냄새가 나기도 했지만 친구들과 놀 시간에 청소를 하고 빨래를 했다. 양아치 짓이나 하고 다니는 녀석들이 어리게 보여서 어울리기 싫었다. 좀 멀리했더니 자신들을 배신했다고 단체로 몰려와 죽지 않을 만큼만 밟아놓고 사라졌다. 오히려 속이 시원했다. 뼈에 금이 가고 얼굴이 깨져서 돌아온 나에게 할아버지는 혀를 쯧쯧 차고 피를 닦아 주었다. 그래서 나도 한마디를 했다.'“미안.”'오랜만에 할아버지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번졌다. '양아치 녀석들과 놀지 않으니 공부할 시간도 그만큼 많아졌다. 무슨 개과천선을 했냐고 담임과 동급생들이 놀랄 정도로 성적이 잘 나왔다. 공부하는 게 재미있었다. 그 즈음 <코스모스>라는 칼 세이건의 저서를 읽게 되었고, 앞으로 천문물리학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