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페르는 손에 든 편지와 전화기를 번갈아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짧고도 기가 막힌 내용이었다.''<전 하이닉스 건설 회사 부사장 라메르입니다. 내 제의에 관심을 가질 거라 믿고 ,아니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압니다. 예정 중인 이집트 여행에 당신처럼 능력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모든 경비와 일체 부대비용은 당연히 제가 부담하는 걸로 하고 여행 후 후한 사례를 할 예정입니다. 다만 이 사실을 비밀로 했으면 좋겠습니다.>'''네페르는 이미 읽은 내용을 다시 한 번 훑어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이집트라는 단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분명히 이 편지는 자필로 쓴 것이었다.'“하이닉스 건설의 라메르라면…….”''네페르는 그의 휴대폰에 연락을 할 용기를 갖게 될 때까지 꼬박 하루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너무도 흥미로운 제안이었고, 비밀이라는 단어와 그녀를 유혹하고 있었다. 또한 동화가 아닌 삶 속에 왕자가 출입하는 건 극히 드문 일이었기에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동화 같은 삶을 꿈 꿀 수 있는 자유는 있으니까. 매일 똑같은 업무에, 달라지지 않는 변화, 제대로 된 연인이라도 있으면 삶의 재미가 달랐을 텐데. 얼마 전 직장에서 돌아와 아파트 문이 강제적으로 누군가 열은 흔적이 있어 부리나케 안으로 들어가 보니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도둑이 들었다는 생각에 귀중품과 한 푼 두 푼 모아둔 비상금을 찾아 헤맸다. 다행히 그것들은 손도 대지 않은 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별로 비싸지도 않은 보라색 숄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숄? 미친놈이 한 짓이라 단정 지었다. 돈도 아닌 숄을 훔쳐갈려고 이 난리를 떨었는지. 그 뒤 네페르는 집에 들어가는 것이 무서워졌다. 빨리 돈 모아 이사를 가야지 하는 생각이 머리에 가득 차 있을 때 그의 제의는 달콤한 꿀맛이었다.'더불어 줄리아와 단 1시간이라도 벗어나고 싶었다. 콜린과 키스를 했다는 사실이 사무실에 알려지면서 한 마디로 인터내셔날 여행사의 여직원들은 레이저 빔을 마구마구 쏘아댔다. 그러자 전생의 엄마였을 거라고 착각할 정도로 줄리아는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아마 도둑 들었다고 얘기하면 자기 집에 오라고 할 게 뻔했다.'“언제까지 날 치마 폭에 감싸려고만 할까?”'네페르는 수화기를 들고 그가 전화를 받을 때까지 심장은 반사조건으로 자신의 역할을 몇 배나 이상 과도하게 초과했다. 안정을 찾으려 심호흡을 하자 낮고 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여보세요.”'“저 네페르입니다.”'그녀가 침착하게 말을 하자 짧은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던 라메르 검은 눈에는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짙은 속눈썹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즐거움을 추구하면서 여러 여자들을 만나고 다닌다고 생각하지만, 여러 여자들을 만나는 데에는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자신이 선택하는 여자는 하이닉스 건설의 여주인이 될 재목이어야 했다. 아버지가 이 자리까지 올라설 수 있었던 이유는 다 어머니의 내조와 사랑 때문이라는 사실은 어릴 적부터 라메르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어떻게 할 건지…….”'“왜 절 선택하신 거죠? 아니 절 어떻게 알았냐고 묻는 게 더 빠른 질문인가요?”'“…….”'“좋아요. 가는 걸로 하죠.”'‘내가 지금 무슨 짓을 했지? 생판 모르는 남자와 여행을 갈 약속을 하다니!’'잠시 네페르는 가지 말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네페르는 왠지 그의 이 수상한 제의가 마음에 들었다. 또한 그의 그윽한 목소리는 손을 꿰뚫고 머릿속을 뒤집어 놓기 충분했다. 믿기지는 않겠지만 그의 목소리는 몇 천 번이나 들어본 정감 있는 목소리였다.'혼란스러움, 기대, 행복감, 기타 등등…….'허나 그녀의 반응과는 다르게 그는 전혀 말이 없었다. 혹시 당연하다는 반응인가? 이래서 잘난 남자들은 밥맛이라니까!'“제 말이…… 믿기지 않나요?”'“그럼 이틀 뒤에 봅시다.”'그녀와 통화를 끝낸 라메르는 책상에서 물러나 창가로 걸어갔다. 봄 햇살이 그의 숱 많은 머리칼과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오는 얼굴을 비췄다. 보름 전 갑작스럽게 죽은 세르 형의 유품에서 오래 된 엽서를 발견했다. 한 장의 사진이었는데 그 사진은 그에게 야릇한 감정을 일으키고 있었다.'“과거로의 여행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