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이익.'순식간의 일이었다. 새벽이었지만 초여름이라 그런지 밖은 밝은 편이었다. 화물트럭 운전사가 졸음운전을 한 듯했다. 횡단보도를 건너던 한 사람이 피를 흘리고 있었다.'이정윤, 죽음엔 높낮이가 없다지만 아까운 24살의 젊은 여자였다. 그녀에게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주시는 동네 아저씨의 일을 도와주러 나온 길이었다. 그것도 일주일 전에 마지막 학기의 등록금을 마련한 가벼운 마음이라 더욱 안타까울지도 모른다.'그녀는 5년 동안 열심히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하면서 살았다. 다른 때와는 달리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왜 주변을 살피지 않았는지. 태어나 처음으로 후회란 감정을 뼈저리게 느꼈다. 어쩌면 귀에 꽂은 이어폰이 원인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눈망울엔 당연히 아픔이 있었지만 여러 가지 감정이 보이는 듯 흔들렸다.'중학교 때 부모님의 교통사고로 혼자된 그녀를 평소 어여삐 여기신 동네의 성당 신부님께서 돌봐주셨다. 요한 신부님을 부모님이라 생각하고 또한 그곳에서 같은 처지에 있는 동생들과 의지하면서 살았다. 부모님이 그리워서 슬프기는 했지만 불행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자신에게 이런 일이 생기다니. 그녀는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힘을 주며 열었다. 눈에 보이는 붉은 물이 피라는 것을 확인했지만 현실로 믿어지지 않았다. 누군가 도와주었으면 좋으련만 새벽의 찻길엔 아무도 없었다. '몸이 떨리는 건지, 추운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엄청난 고통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머릿속은 여러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요한 신부님은 물론이고, 예쁘고 착한 동생들, 불편한 몸이지만 마음은 천사 같았던 채소 가게 아저씨, 절친인 민섭이. '오늘의 사고를 안다면 함께 아파해줄 사람들이었다. 깨진 유리 파편들이 붉은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서히 그녀의 등이 축축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죽음. 그제야 눈에선 눈물이 흘렀고, 입에서도 연신 피가 흘렀다. 어딘지 모를 곳에서 고통이 엄습했지만 그녀는 체념한 듯 눈을 감았다.'그래, 이제 그만하면 됐다. 그동안 열심히 살았으니 부모님도 일찍 왔다고 타박하지는 않으리라. 오히려 잘 왔다며 그녀를 반겨줄 것이다. 후회도 미련도 가질 필요가 없다. 떨리던 몸이 점점 감각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제 모든 것과 이별을 할 때가 온 것이다.'하얀빛이 그녀의 온몸을 감싸더니 어디론가 안내를 하는 듯했다. 더없이 가벼워진 자신의 몸이 움직였다. 이제 부모님을 만난다는 생각이 드니 조금의 고통이나 슬픔조차 없었다. 그러나 순간 그녀의 발목을 잡는 무언가가 있었다. '시선을 내려다보니, 그녀의 또래인 듯 하얀 얼굴에 단정하게 생긴 여자였다. 정윤은 손을 내렸다. 가는 길이 외로울지 몰라 하늘에서 친구를 준 모양이다. 그녀가 웃자 친구도 따라 웃었다. 죽음을 맞은 사람들의 모습치곤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