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로프는 드물게 미간을 좁히고서 욕실을 나가려다 문득 고개를 돌렸다.'거대한 욕조 난간에 하얀 천이 슬쩍 드러나 있었다.'천천히 다가가 내려다보는 올로프의 황갈색 눈에 한줄기 빛이 스쳤다.'안나 밀렌코바는 알몸에 테이블 크로스 한 장만을 두른 채 차디찬 욕조 안에서 웅크리고 잠들어 있었다. 추위에 익숙해진 몸이 따뜻한 방을 견디지 못했던 게 틀림없었다.'안나는, 드러난 팔다리의 심한 찰과상과 끔찍한 멍 자국, 그리고 오른손에 단단히 쥐고 있는 군용 컴뱃나이프만 아니었더라면 천사가 강림했다고 의심했을 만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천천히 몸을 굽히고 욕조 난간을 잡은 올로프는 안나의 창백한 피부와 깊은 밤의 어둠만큼이나 새카만 단발, 오뚝하고 아담한 코에 새빨간 입술, 파르르 떨리고 있는 긴 속눈썹까지를 찬찬히 훑어보았다.'얇고 부드러운 눈꺼풀 아래 잠들어 있을 그녀의 공허하고 차가운 회색 눈동자를 떠올리는 순간, 올로프는 문득 하복부로 피가 몰리며 남성이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그래. 그 회색 눈동자로 스코프 안의 내 머리통을 노렸겠지.'자, 한 방이야. 일격에 날려 버리라고. 종달새 아가씨.'그때, 별안간 안나의 눈꺼풀이 열리며 회색 눈동자가 똑바로 올로프에게 향했다.'휘익, 허공을 가르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컴뱃나이프의 날 끝이 올로프의 눈앞에 나타났지만 그가 조금 더 빨랐다.'날 끝이 올로프의 뺨을 스치는 순간, 한발 먼저 움직인 그가 안나의 손목을 세게 비틀고 나이프를 쳐내려 했다. '안나는 이번엔 뒤를 뺏기지 않으려 사력을 다했고, 그 덕분인지 올로프도 상당한 애를 먹고 나서야 욕조 바닥에 그녀를 엎드리게 할 수 있었다. '어제와 똑같은 자세로 벌거벗은 채 제압당한 안나는 미친 듯 펄펄 뛰며 발악을 해댔다.'그녀가 요동칠 때마다 힘주어 내리누르던 그는 몹시 한심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며 내뱉었다.'“너는 그렇게 예쁜 얼굴을 하고도 여자라는 자각은 전혀 없는 모양이지.”'“…….”'안나가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고 침묵으로 일관하자 올로프는 천천히 몸을 숙여 그녀의 목덜미에 키스하고 부드럽게 속삭였다.'“오늘의 첫 번째 암살 시도는 실패로군.”'“개자식. 미친 자식. 변태 새끼. 죽여 버릴 거야.”'“안나. 그렇게 말만 하지 말고 실행해 보라고. 기회를 줬잖아. 아, 혹시 넌 라이플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얼간이였나.”'올로프의 도발에 안나는 순식간에 눈이 뒤집혀 이를 갈았다. '그녀가 분노로 몸을 덜덜 떨며 어금니를 갈아대는 섬뜩한 소리가 차가운 욕실 안에 길게 울렸다.'오랫동안 뒤에서 내리누른 채 그녀의 벗은 등을 감상하고 있던 그가 문득 물었다.'“넌 왜 살고 있지?”'뜬금없는 그의 물음에 그녀는 거칠게 내뱉었다.'“헛소리 집어치워, 미친 자식아.”'조금 전까지만 해도 웃고 있던 올로프는 무표정하게 그녀의 손에서 나이프를 뺏어든 후 천천히 팔을 놓아주었다.'욕조 바닥에다 부상당한 어깨를 부딪쳤던지, 그녀는 끔찍한 표정으로 고통을 참아내며 엎드려 있었다.'몸을 일으킨 올로프는 만신창이인 안나의 몸 아래 깔린 하얀 테이블크로스에 선혈이 묻어난 것을 보고 그녀의 왼쪽 어깨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어깨에 감긴 붕대는 피가 새어 나온 흔적 없이 깨끗하기만 했다. '몸 어디에도 출혈은 없는 것을 확인한 올로프는, 안나가 멘스를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그녀에게서 뺏은 컴뱃나이프를 멀리 내던지고서 돌아서며 내뱉었다.'“비록 본인은 자각이 없어도 몸은 여자가 맞는 모양이군. 이따 마리아를 올려 보낼 테니 더 굴욕 당하기 싫거든 내 파자마라도 걸쳐 입어.”'올로프가 돌아서는 순간, 안나는 자신이 무엇에 화가 났는지도 모르는 채 눈을 시퍼렇게 빛내며 다시 뒤에서부터 덤벼왔다.'“……!”'안나의 시야가 빙글 돌더니 이내 폐에서 일시에 공기가 빠져나갔다.'오른팔을 제대로 붙잡힌 채 업어치기를 당해 욕실 타일 바닥에 심하게 내동댕이쳐진 안나는 고통스럽게 쿨럭 거리며 찬 바닥에 뒹굴었다.'“아무리 오합지졸들 밑에서 배웠다지만, 뒤에서 덤빌 때는 그 살기부터 어떻게 해보도록.” '차갑게 내려다보던 올로프는 흐트러진 머리를 단정하게 쓸어 올리며 느긋한 태도로 밖으로 나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