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LA발 인천행 월드항공 B777편 일등석.''''''로스앤젤레스 공항을 이륙한 비행기는 태평양 상공을 지나 어느새 대한민국 영공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좌석에 장착된 개인 스크린으로 현재 위치와 인천 공항까지의 남은 시간을 확인한 준하는 여유 있는 숨을 들이쉬었다. ''2주간의 미국 출장.''할리우드에서의 지난 열나흘은 많은 것들을 이루어낸 시간이었다. 미(美) 전역에 국내 영화 ‘혈통’의 개봉을 완성시켰고, 슈라인 오디토리엄에서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 한국 영화사상 최초로 자사 제작 영화가 외국 영화상 후보에 오르게 된 과업을 달성했다. 드림 엔터테인먼트가 이루어낸 역사적인 성과였다. 비록 ‘혈통’은 수상의 행운을 얻지는 못했지만, 그 동안 전무하던 한국 영화의 브랜드 파워를 높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었다.'좌석에 느긋하게 기대어 쾌청한 창 밖을 바라보던 준하는 만족감에 취한 채 퍼스트클래스 좌석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그 순간 마주 보고 웃는 스튜어디스의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내내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직업 정신을 발휘하던 그녀는 입술을 수줍게 오므리고 눈웃음치고 있었다.''‘이 항공사 직원들은 서비스 정신이 탁월하군.’ ''그는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다.''그녀들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눈에 심고 지독히도 매력적인 일등석 승객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비행기에 탑승할 때부터 눈에 띄던 그는 동승한 영화배우 윤지혁보다 더 시선을 잡아끌었다. 깎아 놓은 듯 잘생긴 얼굴은 우아하고 기품이 넘쳤고 고급스러운 취향이 느껴졌다. 그리고 몸 전체에서 발산되는 카리스마는 차갑고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 그가 가진 기질적인 힘에는 아름다움과 잔인한 기운이 함께 뒤섞여 있었다. 그런 극단적인 대비는 보는 이를 매혹되게 했고, 그녀들은 직업의식에 애써 스스로를 정돈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시선이 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준하는 입매를 비틀며 무심히 시선을 돌렸다. 여느 때처럼 어김없이 권태로움이 찾아들고 있었다. 그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부친인 강 회장으로부터 가업인 드림 엔터테인먼트의 영화 음반사업 부분을 맡아 경영에 뛰어든 지도 어느새 4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동안 난관도 많았고, 젊은 오너를 얕보고 무시하는 주위의 텃세도 경험했지만, 그는 그 모든 것들을 순수 의지와 능력으로 불식시키며 드림 엔터테인먼트를 국내 최고의 종합 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 올려놓는 데 성공했다. 일에 대한 무서운 집념과 뛰어난 사업 감각은 그를 언제나 승자이게 했고, 젊은 경영자의 특출한 수완에 경쟁 업체 수뇌들은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욕심 많고 도전을 즐기는 데 주저함이 없는 그는 만족을 몰랐고, 성취 후에는 늘 새로운 목표를 찾아 쉼 없이 전진했다.''잠시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준하는 어디서인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통로 쪽을 돌아보았다. 낯선 이였다. 키가 작은 삼십대 중반의 남자는 친근한 미소를 입가에 걸고 엉거주춤 서 있었다.''“혹시, 드림 엔터테인먼트 강 사장님 아니십니까?”''“아, 예…… 그런데…….”''“맞군요! 하하, 비행기 탑승할 때 언뜻 보고 긴가민가했는데 역시 제대로 봤네요. 안녕하십니까? MBS 드라마팀 PD 김영욱입니다. 전에 한 번 방송국에서 뵌 적이 있는데, 어떻게 비행기 안에서 다시 뵙네요.”''소탈해 보이는 그는 좁은 기내에서 커다랗게 웃었고, 준하는 그제야 전에 한 번 안면이 있던 그를 기억해 냈다.''“아, 네. 반갑습니다.”''준하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저 역시 이런 데서 뵙게 될 줄은 몰랐네요. 어디 다녀오시는 겁니까?”''“네, 해외 촬영이 있어서 LA에요. 강 사장님도 LA에 볼일이 있으셨나 보죠?”''“네, 영화제 관계로요.”''“예…… 큰 성과 이루신 거, 저도 기사 봤습니다. 축하합니다.”''“네, 고맙습니다.”''“그나저나 드림 엔터테인먼트 소속 연기자들 섭외 좀 쉽게 안 되겠습니까? 전에 이성혁 캐스팅할 때 얼마나 애를 먹었던지. 다른 경우엔 기획사 쪽에서 오히려 목을 매는 형편인데 드림 엔터테인먼트는 영 입장이 같지 않아서요. 소문났습니다. 원체 고급스럽게 관리 잘 하시는 거야 알지만, 저희 쪽에서는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저, 여기 제 명함…….”''그는 자못 의식적으로 웃어 보이며 명함을 건넸다. 준하는 그의 것을 받아 들고 자기 것을 되돌리려 하다가 명함을 다 소모했던 것을 깨달았다.''“저는 명함이…….”''“아닙니다. 드림 엔터테인먼트 연락처를 모를 리가 있나요. 아무튼 저희 쪽 사정도 좀 생각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아! 이만 가서 앉아야겠네요. 곧 도착인가 본데요. 그럼 다음에 또…….”''착륙을 알리는 기내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승객 여러분, 이 비행기는 지금부터 약 20분 후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도착지 현지 시간은 3월 27일 오후 5시 25분입니다. 기후는 맑고 기온은 섭씨 4도입니다. 비행기가 곧 하강할 예정이니 좌석 벨트를 매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준하는 일반석으로 향하는 김 PD를 바라보다가 손에 들고 있던 명함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재킷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명함을 꽂았다. 그때 펼쳐진 얇은 장지갑 한쪽 면에 끼워져 있는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아내의 사진이었다. 지난 여름 사촌들끼리의 부부 동반 가족 모임에서 장난꾼들의 성화에 억지로 찍었던 사진.''야외 음식점을 빌려서 일 년에 한 번씩 있는 가족 모임을 가졌었다. 또래의 사촌 형제들끼리 항상 갖던 친목 형태의 모임이었다. 전 해에는 형제들 간의 시간 스케줄이 맞지 않아 그대로 넘어갔었고, 이번에 모처럼 점심 모임을 가졌던 그들은 기념할 만한 증거를 만든다는, 모임 주체자인 큰집 장남의 유난스러움에 부부들끼리 한 컷씩 커플 사진을 찍게 되었던 때였다. 사진 찍히는 것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던 준하는 무심히 뒤로 물러 서 있었지만 세상 모든 것이 즐거움인 그의 아내 주은은 잔뜩 들떠서 남편의 팔을 잡아끌었다. ''번들거리는 눈동자의 광채는 이미 주은의 마음이 온통 사진 촬영에 집중해 있다는 표시였고 벙그레한 입 모양 또한 흥에 겨운 그녀를 제지할 수 없다는 조짐이었다. 주은은 찡그린 준하의 표정은 안중에도 없이 카메라 앞으로 그를 무작정 끌어당겨 세웠다. ''“야! 웃어, 웃어. 강준하! 표정이 그게 뭐냐? 쨔식, 제수씨 좀 끌어안고 무드 좀 잡아 봐. 야하게, 야하게.”''사촌들은 왁자지껄하게 웃으며 놀려댔고, 준하는 정신 사나운 분위기에 밀려 얼결에 카메라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 순간 ‘찰칵’ 경쾌한 플래시 소리가 울리면서 필름이 시간을 담아냈다.''사진은 역시 흐린 정신을 일깨우는 가장 선명한 기록 장치였다. 몇 달이 흐른 지금, 준하는 까맣게 잊고 있던 지난날을 어제의 일처럼 기억나게 하는 낱장의 흔적에 탐탁지 않은 시선을 정지시키고 있었다.''햇빛이 눈부신 듯, 또는 상황이 별로 흥겹지 않은 듯 미간을 찌푸리고 서 있는 그와, 그런 그를 비스듬히 올려다보며 얼굴 가득 웃음 짓고 있는 주은의 얼굴이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제대로 나오지 않은 사진이었다. 누가 보면 재미 삼아 일부러 그렇게 하기로 약속했나 할 정도로 둘의 표정은 상반되어 있어서 야릇한 느낌이 들었다. 화난 사람처럼 찡그린 채 정면을 보고 있는 그와 뻣뻣한 그의 팔에 매달려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웃음을 함빡 짓고 있는 주은은 시선 또한 카메라가 아닌 남편을 향한 채 사뭇 열정적으로 보이기까지 해서 두 사람의 모습은 언밸런스 커플처럼 우스꽝스러웠다. ''준하는 언제 끼워 놓았는지 자신의 지갑 안 투명한 비닐 면에 잘도 맞춰져 들어가 있는 사진을 보며 입술을 씰룩거렸다. 지갑의 신분증 꽂이보다 큰 사이즈였을 사진은 테두리가 알맞게 잘려져서 원래 있던 운전면허증을 뒤쪽으로 밀어낸 채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유치하긴…….’''바라보는 그의 눈이 비아냥거리듯 휘어졌다. 그 시간 아내는 언제나 그랬듯 돌아오는 그를 위해 선보일 무엇인가에 열중해 있을 터였다. 변함 없는 환영을 나타낼 아내. 항상 익숙해진 그 광경을 생각하자 그는 다시 지루해지기 시작했다.''‘만족도 불만도 없는 관계. 네가 추구하던 관계 아니었던가? 그저 기본에 충실하기만 하면 그걸로 족하다고……. 그래, 지나친 만족은 네 자신을 느슨하게 허물어뜨릴 것이고, 그건 네가 바라는 게 아니지. 차라리 평온을 적당히 지겨워하는 지금의 현실이 이상적이다. 그럼에도 이제 와서 새삼 자극적인 변화를 꿈꾸는 네 욕구는 무엇이지? ……그래, 아무 사건 없는 무료한 일상이 너무 오래 지속된 때문일 거야. 암, 그렇고 말고. 그저 잠시 심심해진 거라 해두자.’''창 밖으로 어느새 하늘과 땅이 맞닿아 오고 있었다. 그는 점점 가까워지는 고국 땅을 바라보며 한순간 엉뚱한 생각에 빠졌던 자신의 객쩍음을 비웃었다.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는 그의 눈이 다시 심드렁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