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장'“반장님. 저 먼저 들어갈게요. 다들 수고하세요.”'강은은 형사과 사람들에게 인사를 꾸벅하고 경찰서를 나왔다. 닷새 동안 집에 한발자국 들여놓지 못하고 불철주야로 일을 했더니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것만 같았다. 이동팔을 잡아들이는 것으로 지금 매달려 있던 사건이 한 단락 해결되었다. 입을 쩍 벌려 하품을 하며 강은은 기지개를 폈다. 그녀의 스스럼없는 행동에 길거리를 걷던 사람들이 그녀 옆을 슬슬 피했다. 찢어진 청바지에 검은 셔츠 그리고 계절과 어울리지 않은 두툼한 조끼. 삼일동안 감지 않은 머리를 하나로 질끈 올린 그녀는 머릿속이 간지러운지 호주머니 속에 있던 볼펜을 꺼내 머릿속을 벅벅 긁으며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컵라면과 삼각 김밥이 든 봉지를 허리에 꿰차고 캔 맥주를 마시며 집으로 올라갔다. 혼자 살다보니, 아무래도 무언가 해먹는 건 정말 귀찮았다. 같이 먹어줄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괜히 밥을 해놓았다가 일 때문에 며칠 들어오지 않으면 곰팡이가 피어올랐다. 몇 달 전엔 생일이라고 괜히 미역국을 끓였다가 한 끼 제대로 먹지 못하고 모두 부어 내버린 적이 있어 그 이후론 집에 있는 냉장고는 텅 비고 밥통의 밥은 라면에 밥 말아먹을 때만 열린다. '한걸음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숨이 차올랐다. 그녀의 집은 꽤 높은 언덕에 있는 주택의 옥탑 방이었다. 바람이 선선하게 불고 해가 저물어 이렇게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을 느낄 때가 좋았다. 백여 개의 끝도 없는 긴 계단을 오르며 강은은 숨을 들이쉬었다. 집으로 들어가는 길, 그녀의 집안에 불이 켜져 있었다. 혹시, 아침에 불을 끄지 않았나 생각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그렇다면 짐작할 수 있는 건 단하나, 역시나 집 앞에 도착해 있는 윤 기사와 그 차를 보고 강은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주인 없는 집에 불쑥 들어오는 건 가택무단침입이라는 거 말씀 드렸을 텐데요.”'비닐봉지를 싱크대 위에 던져 놓으며 강은이 조끼를 벗었다.'“몇 달 만에 보는 어머니한테 인사도 하지 않니?”'“어머니요? 어디에 내 어머니가 있단 말입니까? 하, 저 일곱 살 때 돌아가신 어머니가 살아 있단 말인가요?”'“갈수록 괴팍해지는구나.”'“딴죽 걸려고 오신 건 아닐 텐데 할 말이나 빨리 하고 돌아가시죠. 피차 얼굴 마주할 사이 는 아니잖아요.”'좁고 케케묵은 이 집에 있는 것이 조영은 불결하고 싫었다. 손수건으로 코를 감싸며 강은을 쳐다보았다.'“나도 오기 싫지만, 네 아버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온 거야. 이번 주 토요일 일곱시 비 워 둬라. 윤 의원님 집안과 식사약속 있다. 특별히 신경 써서 나오도록 해. 그리고 그 옷들 은 다 뭐니? 집도 새로 구해봐. 명색이 네 아버지가 장관인데, 이런 식으로 집안에 먹칠을 해야겠니?”'“남편하나에 마누라가 네댓 명 되는 집이 뭐 그리 잘났다고 이렇게 나오시는지. 흥.”'조영의 말을 심하게 비틀며 강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못된 년. 그 어미에 그 딸년이라더니…….”'“아, 차차차…… 죄송합니다. 덕망 높으신 이조영 씨께 제가 또 실례를 범한 거군요. 이 주 둥이 방정이네요. 그렇죠?”'자신의 입을 손바닥으로 톡톡 치며 강은이 피식 웃자 조영이 입술을 깨물며 몸을 파르르 떨었다.'“저 안가요. 버린 딸을 뭣 때문에 데리고 나가려고 하세요? 저와 밥 먹으면 체할 것 같다면 서.” '“나도 네년과 밥 먹는 거 싫어. 그런데 어쩌겠어. 대단한 네 아버지가 명이시니.”'“말씀 끝난 거 아닌가요?”'강은이 대문을 열며 그녀에게 나가라고 고갯짓을 하자 조영은 손을 치켜 올렸다. 그녀의 뺨을 때릴 기세였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강은은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며 독기어린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놀란 조영은 그 손을 빼내려고 하였지만, 강은은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그 버릇 여전하시네요. 그런데 어쩌나. 형사돼서 힘 좀 쓰니까 맞으면 그보다 훨씬 세게 돌려주고 싶어지더라구요. 실험 해볼까요? 당신이 내 뺨을 때리면 나도 당신 뺨을 때릴 수 있을지 없을지…….”'강은은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내려놓으며 얼굴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자신의 볼을 때려보라고 그녀를 충동질시켰다. 그런 강은의 도발이 더욱 맘에 들지 않은 조영은 주먹을 움켜쥐었다가 이내 손을 내려놓았다. 강은의 눈빛이 무서워 그녀가 수그러든 것이다.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울고 때리면 모두 맞고 다락방에 갇히면 울지도 못한 채 두려움에 떨던 그런 어린아이는 이제 없음을 알게 된 것이다.'“때리고 싶을 땐 언제든지 때리세요. 단, 각오하시구요.”'씽긋 웃으며 강은이 부엌 가스레인지 위의 주전자에 물을 끓였다. 제 할 일도 바쁘다는 듯 조영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자존심을 긁혀버린 조영은 자신의 분을 참지 못해 얼굴이 파랗게 질려서 그 집을 나왔다. 정말 저런 계집이 뭐가 불쌍하다고 매번 신경 쓰고 건지, 신원호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조영은 고개를 내저었다. 저런 거지같은 몰골을 하고, 이런 다 헐어진 집에서 살고 있는 강은이 맘에 들지 않았다. 보란 듯이 집안을 망신 주는 것 밖에 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남자들도 하기 힘들다는 형사라는 직업을.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조영은 나왔다.'“정말 맘에 안 들어. 집에 처음 온 그 날 부터.”'그녀가 문을 걷어차며 나가자 강은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자신의 가슴을 진정시키며 옆에 있던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어릴 땐 버리더니 이제 인연을 끊자고 하니 갑자기 신경을 써주며 아비노릇을 하려고 하는 신원호가 야속했다. 강은에 대한 신원호의 애정이 커질수록 조영의 괴롭힘은 더해졌다.'집안의 불을 끄고 강은은 욕실로 들어갔다. 입고 있던 거추장스러운 옷들을 모두 벗어내고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 몸을 담갔다. 눅눅하게 곰팡이가 피어오를 것만 같던 몸이 겨우 풀리면서 기분이 나아졌다. 수증기로 꽉 찬 욕실 안에서 강은은 뜨거운 물로 얼굴을 흠뻑 적시며 두 눈을 감았다. 손을 더듬거리며 가슴을 둘러싼 등의 아래까지 만져보았다. 그건 사람의 피부가 아니라 늘어진 고무를 만지는 듯 쭈글거리고 아직도 시큼하게 아픔이 저려오는 곳이었다.'그녀의 욕실엔 거울이 없었다. 집안에도 큰 거울 없이 손에 들 수 있는 작은 손거울 하나가 전부였다. 화상자국을 볼 때 시큼거리는 아픔보다 뼈저리게 아픈 건 잊혀지지 않는 과거의 기억 때문이다. 강은은 손톱의 날을 세워 그 상처를 긁어버리려 몇 번을 시도하며 피를 내본 적도 있지만 그럴 때마다 또렷하게 떠오르는 기억들이 그녀를 옭아매었다.'샤워를 마치고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강은은 곧장 침대이불속으로 들어갔다. 젖은 머리를 말리지도 않고 그대로 잠에 곯아떨어졌다. 달이 기울어 그 빛이 넘쳐흘렀다. 창가에 스며들어 그녀를 비추며 안락하게 그녀를 인도해주는 듯하였다. ''*****''“에취.”'그녀의 재채기 소리가 경찰서를 울렸다. 멈추려고 해도 멈춰지질 않고 목도 아프고 콧물까지 흐르는 걸 보니 분명 감기에 걸린 것이다. 옆에 앉아있던 이 형사가 의자를 바싹 붙이며 강은에게 휴지를 내밀었다.'“귓구멍 떨어지겠다. 무슨 소리가 그렇게 요란해? 병원은 가봤어?”'“내가 병원 갈 시간이 어디 있어요?”'“그 정도는 아니다. 괜찮으니까 다녀와.”'차 형사위 권유에도 강은이 손사래를 쳤다. '“됐어요. 어제 목욕 하고 옷을 안 입고 자서 그런가봐요. 나 원래 감기 잘 안 걸리는데.”'아무 생각 없이 말을 내뱉는 강은을 보며 차 형사가 키득키득 웃었다.'“여자나이 서른에 혼자 벗고 자는게 무슨 자랑이라고.”'짓궂게 놀리는 차 형사의 말에 강은이 주먹을 불끈 쥐며 차형사의 얼굴 앞에 들이밀었다. '“차 형사님. 방금 한 발언 성추행에 해당되는 거 아시죠? 고소할거에요.”'“자네들 아직 신 형사 모르나? 놀릴 사람을 놀려야지. 짓궂기는…….”'터줏대감 노 반장이 껄껄 웃으며 강은을 쳐다보았다. 아버지와 같은 느낌은 분명 이런 것이라고 강은은 생각했다. 언제나 바른 정의를 실천하고 모두 에게 귀감이 되는 분. 자신의 안위와 행복이 중요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다른 이들을 배려하고 지켜내려 노력하는 자상한 노 반장은 강은이 형사생활을 함에 있어서 버팀목이었다.'“아, 신 형사 오늘 니 마누라 오는 건 알고 있지?”'“예?”'강은이 처음 들었다는 듯 다소 놀라는 얼굴로 노 반장을 쳐다보자 머리를 긁적이며 노 반장이 혀를 끌끌 찼다.'“젊은 사람이 그리 건망증이 심해서야……. 이야기 하지 않았나? 오늘 권 형사 대신 새 마 누라 오잖아.”'“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반장님이 말씀하셨다면 들었을 텐데. 전혀 기억이…….”'입을 삐죽 내밀며 강은이 씽긋 웃었다. 자신을 거짓말쟁이로 만든다며 노 반장이 펄쩍뛰었고 강은도 그를 따라 웃음 지었지만 마음 한구석이 찡해졌다. 예전 파트너였던 권 형사는 일이 너무 고되고 무섭다며 얼마 전 교통과로 가버렸다. 한솥밥을 먹던 동지를 그 누구하나 말릴 수 없었다. 범인의 칼에 찔려 수술 후 복부에 커다란 흉터까지 생긴 그가 얼마나 두려움에 떨었는지 그 마음을 알기에 입을 굳게 다문 채 돌아서는 그의 발목을 부여잡은 사람은 없었다. 단지 싸늘한 침묵이 형사과의 분위기를 알려주었다. 형사도 팔 다리 찔리면 피가 나고 칼 든 사람이 앞에서 휙휙 휘두르면 두려움에 떠는 사람인데 어찌 무섭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강은은 얼마 전 서울 시내 사거리에서 교통단속을 하고 있던 권 형사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았다. 불안에 살던 사람이 드디어 평온을 되찾은 듯 한 얼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