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일류 홈쇼핑>의 로고가 새겨진 벽면을 배경으로 놓인 책상은 세련되면서도 위용이 넘쳤다. 그 뒤로 앉은 주인처럼. '너른 어깨에 딱 맞게 재단된 최고급 슈트와 그것에 맞춘 듯 어울리는 넥타이는 남자의 세련된 감각을 여실히 보여주었고, 선 굵은 눈썹과 굳게 다물린 입술에서는 근접할 수 없는 위엄이 풍겨 나오고 있었다. 그는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처럼 잘생겼지만, 신화는 신화일 뿐. 현재 생명력 없는 조각으로밖에 우리가 그들의 모습을 접할 수 없는 것처럼, 그 역시 그랬다. 무표정.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을 듯한 남자다. '그런데 지금, 믿을 수 없게도 그가 화를 내고 있다. '쾅! 책상을 주먹으로 내려쳐 <대표 이사 류태화>라는 명패가 흔들릴 정도로.'“지금 뭐라고 했나?”'온몸에서 화기가 풀풀 풍겨져 나오고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차분하다 못해 차가웠다. 그것은 소리를 지르는 것보다 더 듣는 이의 오금을 저리게 만들었다. 그의 비서로 보이는, 바로 앞에 선 남자는 그다지 그런 것 같진 않지만 말이다. '“제윤 도련님이 학교 앞 분식점 여자와 가까이 지내고 있다는 말씀, 드렸습니다.”'차분하기로는 상관에 이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듯하다. 전혀 주눅 들지 않고 할 말을 다하는 비서를 향해 결국 태화는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이현석!”'사적인 자리에서 그들은 친구였지만, 회사에서는 단둘이 있어도 ‘사장님’과 ‘이 실장’이었다. 지난 칠 년간 그 선을 넘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현석이 하는 말이 어찌나 황당한지, 태화로서는 그 선을 넘을 수밖에 없었다. '“여자의 이름은 정보라. 놀랍게도 우리 일류고등학교를 나왔더군. 정확히 말해서, 중퇴.”'이제 현석도 그를 사장이 아닌 친구로 대하고 있었다. 미간을 찌푸린 채 현석이 말을 하는 동안, 태화의 표정은 아예 구겨진 종이짝 마냥 변해갔다. 그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중퇴?”'“2학년 때. 애를 가져서.”'순간, 뭐 하나 죽은 듯한 정적이 흘렀다. 황당하여 대꾸조차 할 수 없었다. '고등학생 때 임신을 했다? 그렇다면 지금은 애 엄마?, 즉 미혼모란 말인가? 하! 홍제윤, 완전히 미쳤구나. 7살 많은 여자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기겁할 일인데, 미혼모라니! '깊은 한숨을 내쉬어 흥분을 가라앉힌 태화는 애써 침착한 음성으로 물었다. '“도대체 그 여자와 어느 정도의 사이인 거야? 설마 가출 후 계속 그 여자 집에 살고 있는 건 아니지?”'“그건 아니고. 학원 레슨 때문에 제윤이가 야간자율학습도 안 하잖아. 그런데 수시로 그 분식점 여자의 아들이랑 놀다가 학원도 빼먹고 그러나 봐. 뿐인 줄 알아? 바쁠 땐 제윤이 녀석이 김밥 배달도 해준다더군. 그 곱게 자란 왕자님이 말이야.”'“미쳤군.”'말이 곱게 나오지 않았다. '하나뿐인 아들이 가출을 했건만 경찰에 실종신고를 한 게 다일 뿐 직접 찾아볼 생각조차 않는 누나를 대신해 그가 나선 터였다. 제윤에 대한 걱정으로 머리를 싸매고 누운 그의 어머니 때문에.'이 사실을 알면 또 얼마나 충격을 받으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