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네가 좋아질 것 같아. 아니, 이미 너에게 빠진 거 같아.”'“……!”'선우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윤진은 고개를 돌려 긴장된 눈빛으로 선우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젖어 있는 그의 머리칼에서는 간간히 빗방울이 떨어졌다.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윤진은 그저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겠어. 9년 전 널 처음 봤을 때부터인지, 서점에서 널 봤을 때부터인지, 아니면 공연 때의 네 연주하는 모습 때문인지 모르지만, 나 확실히 네가 좋아. 널 내 곁에 두고 싶어.”'“선, 선배…….”'선우의 고백을 들은 윤진은 할 말을 못 찾고 입만 벙긋거렸다. 생각지도 못한 그의 고백이 그녀도 싫지는 않았지만, 아니 그녀의 가슴을 뛰게 하기에 충분했지만, 너무 갑작스런 느낌이 들어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혼란스러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본 선우는 겸연쩍은 듯 웃었다. 사실 자신의 행동이 혼란스럽기는 그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간 자신이 놀랍지만, 선우는 솔직해지고 싶었다.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미안해, 곤란하게 만들 생각은 아니었는데……. 당장 네 대답을 원하는 것은 아니야. 그저 내 감정을 분명히 해 두고 싶었어. 널 생각하면 사는 것이 즐거워져서, 내 이런 마음을 당신도 알았으면 해서. 언제부터인가 자꾸 네가 떠올라. 널 떠올리면 기분이 좋아져, 자꾸 실없이 웃게 돼. 내 이런 얘기 부담스럽니?”'“아, 아니요. 그런 것보다 좀 당황스러워서.”'사실 윤진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부터인가 문득 그가 궁금해지고, 그와 석현을 생각하면 입가에 스르륵 미소가 번지곤 했다. 그 감정의 실체는 관심이었다. 그동안 그녀는 그 감정의 실체를 무시하려 했던 것이다. 그녀는 두려웠던 것이다. 부지불식간에 생겨난 관심이 어떤 방향으로 갈지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 당황스러울 거야. 나도 이런 나 자신이 너무 낯설어. 서두르지 않을게. 천천히 와도 돼.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으니까. 얼마든지.”'선우의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한 윤진은 긍정의 의미로 그에게 가볍게 키스를 했다. 하지만 그녀의 키스는 그로 인해 더욱 농밀해졌다. 다시 그녀를 벽에 밀어붙인 선우는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그녀에게 키스를 했다. 그의 커다란 두 손에 그녀의 얼굴이 거의 묻히다 시피 했다. 키 차이가 나서 윤진은 까치발을 들고 그의 키스를 받아들여야 했다. 키스의 시작은 그녀가 했지만, 이미 그가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그가 내뿜는 뜨거운 열기를 느낀 윤진은 그를 꼭 끌어안은 후, 더 이상 폭주하지 않기 위해 입을 열었다. '“선배, 그만 가야겠어요.”'하지만 윤진은 선우를 꼭 끌어안은 자신의 팔을 풀지 않았다. 사실 선우와 밤이 새도록 처마 밑에 있고 싶은 그녀였다. 그의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도란도란 얘기하고 싶은 그녀였다. 혼란스러운 마음과 별개로 그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그래, 윤진아. 그만 가자.”'어느새 빗줄기는 가늘어져 있었다. 더불어 바람도 잦아들었다. 선우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다시 빗속으로 나왔다. 끓어오르는 열망은 계속 그녀를 취하라고 속삭였지만, 그는 그 도화선 같은 열망을 지그시 눌렀다. 대신 쏟아지는 빗줄기에 그 열망을 식혀 보았다. 물론 턱없이 부족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