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뒤덮인 명륜의 땅은 고요하고도 적막했다. 이미 한 차례 눈보라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온통 새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태하인들과 명륜인들 간의 뼛속 깊은 갈등도, 무너져 가는 왕실에 대한 절망감도 모다 묻어버린 채 순백으로 변해버린 세상. 그 광활한 정경을 응시하던 사내, 진무는 말없이 발길을 돌렸다.'언뜻 보기에도 두 다리가 푹푹 빠질 만큼 고된 길이었건만, 진무는 거침없이 발을 내딛고 있었다. 눈 위에서도 걷기 쉽도록 만들어진 털신은 명륜인들이 겨울에 주로 이용하는 것이었다.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한 가죽옷, 얼굴과 머리를 단단히 감싼 모자는 그를 여느 평범한 명륜인으로 보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 길만 지나면 자운산이다. 이제는 정녕 얼마 남지 않았군.’'한겨울의 바람에도 얼음이 얼지 않으며, 세상 전부를 뒤덮어버린 눈조차 침범하지 못하는 곳들 중 하나. 지형이 다소 험한 데다 그곳을 지나려면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탓에 평소에는 사람들이 잘 오가지 않지만, 겨울만큼은 예외였다. 게다가……. '진무는 이 산을 언급했던 여인, 율란을 떠올렸다. ''-그분들이 명륜의 땅에 발을 들일 때면 이미 눈이 제법 내렸을 것이랍니다. 필시 형주성의 성주는 황자 전하와 세자 저하께 자운산의 길을 언급할 터. 그러니 진무, 당신이 먼저 출발해주세요.'-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궁주 마마.'-두 대의 화살을 쏘아주세요. 차후 해야 할 일들은 전해드린 편지에 써져 있답니다.''그는 품 안에 깊숙이 갈무리해둔 화살과 편지를 떠올렸다. 자운산의 중턱에 이르러 편지를 열어보라 하였던가. 그 속에 어떤 명령이 써져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의 짐작대로라면 세자 이지천우나 어전호위검과 관계되어있을 터였다. '진무는 품속에서 서찰을 꺼내들었다. 궁주의 말대로 대강 자운산 중간쯤에 당도한 터이니 이제는 열어보아도 될 터. 그는 서찰의 봉인을 뜯었고, 곱게 접혀져 있던 종이를 펼쳤다.'“……!”'찰나의 순간, 진무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어지간한 일에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을 만큼 냉정한 살수를 놀라게 한 것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한동안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손 안의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감히 생각조차 해본 적 없을 만큼 크나큰 음모가 이 안에 들어 있었다. 아마도 지금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자는 세상천지에 하령 궁주와 진무, 단 둘뿐일 터였다. '‘참으로 지독하군. 저가 나고 자란 나라마저 모다 망가뜨리려 하다니. 여인의 한이란 이다지도 강한 것이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