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6년. 경기도 이천.'처마 끝에 매달린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반짝이며 그 아래 만들어진 작은 그림자까지 포근하게 감싸고 있었다. 처마 아래에는 ‘고척리 밥상’이라고 적혀 있는, 색이 벗겨진 간판도 보였다. 처마와 원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는 낡은 지붕을 넘어가면 점포와 붙어 있는 한옥가옥이 드러난다. 오래된 나무 향을 가득 머금고 있는 집 안에서는 고즈넉한 한옥의 아침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빠른 템포의 가요가 흘러 나왔다. '“오오오오오! 오늘 밤 당신이 내게 와준다면, 와준다면 난 당신을 위해 라면을 끓이겠어어어어어.”'무릎 위까지 치켜 올라간 교복 치마, 풀어헤친 머리칼을 풀풀 날리며 삐그덕거리는 마룻바닥을 풀쩍풀쩍 뛰어다니는 시내의 모습에 앉아 있던 할머니와 희락이 웃음을 터트렸다. '“큭큭큭. 아줌마, 나와서 시내 좀 보세요!”'머리빗을 마이크 삼아 능청스럽게 노래를 부르는 시내의 모습에 자지러지듯 웃던 희락이 '배를 부여잡고 기듯이 일어나 마루와 이어진 부엌으로 들어섰다. 식탁에 늘어져 있는 반찬통을 보자기에 일일이 싸고 꼼꼼하게 매듭을 짓고 있던 시내의 모친이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희락을 마주했다.'“아침부터 이게 웬 난리야?”'“어제 국사 쪽지 시험 가지고 내기 했거든요. 진 사람이 가족들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기. 얼른요!”'시내 모친의 등을 떠밀어 마루로 나온 희락은 엇박자로 박수를 치며 흥을 돋우고 있는 할머니 옆에 그녀를 앉혔다. 그리고 오래된 전축의 볼륨을 더욱 높였다. '“맛좋은 라면을 끓였어어어어. 오오오오, 당신이 좋아하는 너구리 한 마리 끓였어어어어.”'어깨를 들썩이며 할머니에게 윙크를 날리는 시내의 쇼맨십에 희락이 또다시 배꼽을 잡고 웃었다. 노래는 클라이맥스에 다다르는지, 전주가 더욱 빠르고 비트가 강해졌다.'“우! 우! 우! 이게 웬일이야, 하늘이 우리 사랑을 축복하나봐아아아. 다시마가, 다시이이마가 다섯 개! 예!”'괴성까지 지르며 맨발로 바닥을 뛰어다니던 시내는 이마 위의 흐르는 땀을 닦고 무릎을 꿇으며, 음악의 드럼 비트에 맞춰 마지막 인사를 멋지게 마무리했다. 희락이 손가락 휘파람을 불어 댔고, 마당을 향해 탁 트인 마루는 한가득 웃음이 만발했다.'“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너희 학교 안 가?”'모친의 웃음기 섞인 꾸지람에 시내가 얼른 벽에 걸린 갈색 뻐꾸기시계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황급히 마이크처럼 쥐고 있던 빗으로 머리를 다듬기 시작했다. 하지만 춤을 추며 뒤흔들었던 머리칼이 완전히 엉켜 버려 쉽지가 않았다. '“하여간에 여자애가 칠칠치 못해요.”'전축 전원을 끄고 시내에게 다가간 희락이 그녀에게서 빗을 빼앗아 들고 풀어헤친 머리칼을 부드럽게 빗어 내리기 시작했다. '“오늘 영어 단어 시험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