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사랑의 과녁 ''''검은 밤하늘을 뛰어노는 노란 반딧불이와 머리 위로 쏟아지는 하얀 별빛이 밤바다를 무심히 보고 있는 사내를 비춘다. '자연이 사내에게 허락해 준 위로와 인내의 공간. 거친 바다와 한 몸이 되어 살아온 사내는 시간마저 초월하고 그곳에 그렇게 앉아 있었다. 그런 사내를 멀리서만 지켜보는 여인. '그러나 이곳이 어디인가. 적나라하다 못해 태곳적 순수마저 드러내게 하는 장소. 은밀한 어둠이 그 어느 때보다 위태로운 두 사람의 모습을 비추었다.'함께 누운 여인이 그리워 사내는 밤바다를 택했고, 또 그 사내가 그리워 여인은 몰래 일어나 사내를 지켜본다. 그렇게 무수히 많은 밤을 보내면서 무르익어 버린 그리움은 절망‘切望’의 꽃을 피우고 절애‘切愛’의 열매를 맺는다. '여인이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오늘만큼은 사내를 가까이서 위로하고 싶다. 오늘만큼은.'“잠이 오지 않으십니까?”'사내는 고운 여인의 배려가 오히려 불편하여 밤바다를 향해 말을 건네었다. '“밤이 잠을 허락하지 않은 지가 꽤 되었소.” '안다. 알면서도 묻게 된다. '“내일이면 이곳을 떠나야 하니 차마 주무시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었습니다.”'“그렇지 않소. 바다는 변함없이 이 자리에 있을 테니.”'“…….”'지속되지 못하는 그들의 대화. 아쉬움에 슬그머니 곤의 옆 자리에 앉는다. 이렇게 하는 것이 그를 더 힘들게 할 것임을 알면서도, 홀로 밤을 지새울 그를 떨쳐내지 못하여 못난 미련을 갖는 것이다. '가비를 뚫어지게 응시하는 곤. 그를 올려다보는 가비. 마주친 눈이 오로지 정인‘情人’만을 담아내며 엉켜든다. '돌연 시간이 정지하고 세상에는 두 사람만이 전부다. 찌르르 풀벌레의 울음소리가 아련히 들려오고 촤르르 시원스레 몰아치던 파도 소리도 속삭임처럼 점점 멀어져 간다.'습하고 시원한 바람이 휘익 지나가며 이들에게 경고해도 못 들은 체하며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 곤이 가비의 얼굴에 붙어 버린 머리카락을 떼어 주려 손을 내밀었다.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겨주는 곤의 손끝이 살짝 떨려온다. 눈을 감았다. 그 눈에 스민 갈망. 오늘만은 못 본 체하며 져 주련다. 차라리 눈머거리가 되련다. '“가비…….”'오랜만이다. 사내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 목소리에도 갈망이 섞여 있으나 그것도 못 들은 체할 것이다. 오늘만큼은, 오늘만큼은 귀머거리가 되련다. 그렇게 해서라도 이 사내의 옆에 함께 있고 싶다. 그 마음이 더욱 거세어져 그 이상을 바랄 것을 알면서도 또다시 스스로를 속인다. '바다 내음이 섞인 뜨거운 사내의 체취가 점점 가까워졌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곤의 손길을 느낀다. 참으로 오랜만이다. 자신의 머리를 어루만지는 이 부드러운 손길이 그리웠다. 그러나 그 애틋한 손길을 받아내는 대신 가비는 사내의 손을 잡아끌어 내렸다. 그의 손을 뒤집고 그 큰 손바닥에 자신의 작은 입술을 갖다 대었다. '움찔. 그가 놀란 것을 알면서도 못 본 체한다. 다시 곤의 손목에 가비의 입술이 사뿐히 내려앉는다. 보지 않았지만 자신의 행동에 당황한 것이 틀림없다. 몸을 구푸려 곤의 크고 거친 맨발에도 입술이 닿았다. 그리고 그 입술이 다른 발을 향하였다. 탁! 곤이 가비의 마른 어깨를 끌어올렸다. 그 눈이 놀라움으로 커져 있었다. '가비는 말없이 곤을 바라보았다. 가비의 눈에도 자신과 똑같은 갈망이 스며 있음을 보았다. 마주한 그 마음에 곤의 검은 눈이 안도감과 희망으로 벅차올랐다. '너무나 기쁘고 흥분된 나머지, 곤이 두 손으로 가비의 머리를 감싸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거칠게 파고드는 입맞춤. 그 성급한 입맞춤에 가비의 눈이 저절로 감겨들었다. 쉬지 않고 끓어오르며 괴롭혀대던 뜨거운 정염이 탈출구를 찾은 것을 알고 기뻐 날뛰기 시작했다. '가비의 입술에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모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입술을 떼어내고 거칠게 숨을 몰아쉰다. 그리고 입맞춤에 함께 취해 있던 가비를 아프게 쳐다보았다. '“하아, 가비. 널 어찌하면 좋을까?”'가비의 작은 턱과 뺨을 자신의 두 손으로 감쌌다. '이리 작고 가녀린데, 이런 상태로는 순식간에 그녀를 부서뜨릴 것만 같다. 오랜 시간 억눌러온 자신의 정염‘情炎’이 활화산이 되어 폭발하기 직전이다. 충혈된 눈이 튀어나올 것 같고, 으스러질 듯 강하게 다문 턱이 욱신거릴 정도다. '참기 힘든 욕구를 막아 보고자 서둘러 그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려는 곤을 가비가 붙잡았다. 멈칫. 둘의 눈빛이 엉켜들었다. '“가지 마! 오늘만이야. 오늘만.”'그녀가 애원하고 있었다.'“널 부서뜨릴지도 모른다. 내가 널 죽일지도 몰라.”'‘죽어도 좋아.’'가비의 애절한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이다. 자신의 제어를 벗어난 정염이 실낱같던 자제력을 순식간에 툭 끊어 버리고는 파앙 용솟음쳤다. 참고 참았으나 다 소용없게 되었다. 도망가려던 곤이 결국 포기하고 가비를 으스러져라 껴안았다. '‘이제 더는 못하겠다. 너를 죽이고 나도 죽으련다.’ '“지금부터는 날 거부하지 마라! 네가 내게 애원하는 순간부터 모든 것이 끝나 버렸다!”'‘널 지켜 주려 했던 내 마음도, 가까스로 참아내던 내 욕구도.’ '혹여 가비가 거부할까 또다시 도망가 버릴까 가비를 꼭 껴안은 채로 거칠게 가비의 상의를 끌어내렸다. 그것도 여의치 않자 순식간에 그것을 잡아 쭉 찢어 버렸다. 가비의 어깨에 입술을 파묻고 비벼대었다. 그녀의 가느다란 목덜미에 코를 파묻고 거친 신음을 내뱉었다. 보드랍고 여린 가비의 가슴을 자신의 큰 손으로 덮어 버렸다. 터져 나오는 가비의 신음 소리가 색정적으로 들렸다. 성급함에 배를 훑어보기도 하고 엉덩이와 허벅지 사이를 오르락내리락 하기도 한다. '곤이 너무 세게 껴안고 있어 제대로 숨을 쉬기조차 힘들다. 이리저리 공간을 만들어 보려고 바르작거리자, 그조차도 도망가는 것으로 여겼는지 더욱 자신의 너른 품으로 옥죈다. '“곤!”'그제야 가비의 상태를 알아챈 곤이 가비를 풀어 주었다. 대신 가비의 마른 어깨를 틀어쥐었다. 그렇게라도 해서 가비를 붙잡고 싶었다. '‘더 이상 도망가지 말라고. 나를 더 이상 이 고통 속에 버려두지 말라고.’'그리고 다시 시작된 입맞춤. 처음보다는 훨씬 여유롭지만 여전히 거칠다. 혀와 혀가 엉키고 그 사이로 침이 고이고 흘러내렸다. 그러나 게걸스럽기까지 한 곤의 탐욕스런 입맞춤은 멈출 줄을 몰랐다. 혀뿌리가 뽑히는 것 같은 짜릿한 고통 속에 숨 쉬는 것조차 잊었다. 입술을 빨아 당기다가 참지 못한 곤이 그것을 깨물어 버리자 그 상처 사이로 피가 흘렀다. 그 흐르는 피조차 아까운 듯 받아 마시며 그의 탐닉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계속되었다. '열정이 담긴 손짓으로 가비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는다. 그리고 가녀린 목덜미를 깨물었다. 가비가 신음을 흘리자, 이번에는 그곳을 혀로 쓸어내리며 가비를 달래었다. 뜨거운 곤의 입김이 가비의 귓바퀴를 데웠다. 온몸의 털이 바짝 서는 그 오소소한 느낌에 가비가 몸을 틀었다. 그러나 자신의 어깨 근처를 잡고 도무지 놓아줄 생각을 않는다.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곤의 너른 가슴에 두 손을 갖다 대었다. 그제야 멈칫한다. 가비가 속삭였다.'“곤. 내게도 기회를 줘.”'부드럽게 달래는 가비의 목소리에 곤의 다급함이 봄눈 녹듯 사라졌다. 그제야 곤이 몸을 떼어내고 가비를 뚫어지게 내려다본다. 가비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어둠 속에서 오직 한 사람만이 인식된다.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바로 지금이 태어나 가장 아름답고 행복하다 느끼는 순간이다. '살아 있다는 것이, 정인을 향해 질주하는 심장을 가졌다는 것이 이리도 벅찬 것이었던가! '불과 도구를 사용하고 말을 할 수 있다는 것 외에는 인간이 짐승과 다른 것이 없다 여겼다. '‘그러나 다르구나. 참으로 다르구나.’'짐승은 제 정인의 뛰는 심장 따위는 아무런 상관도 없을 것이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에 애정 따위 담을 일 없을 것이고, 서로의 체온을 나누고 쓰다듬으며 서로의 존재에 감사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사랑. 인간이란 이렇게 사랑하며 살아가는 존재인 것을 이제야 알았다. '눈물이 난다. 가비. 나는 이제야 알겠다. 세상에 태어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저 풀밭의 벌레보다, 바다의 해파리보다 못하다 생각했다. 다른 사람을 죽이든, 내가 죽든 죽으면 그만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구나.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축복이구나. 이제야 알겠다. 이제야 해신께도 감사를 드리겠다. 너는 저 해신님이 내게 준 선물이다. 그랬구나. 그런 거였어. 곤은 가비를 바라보며 인간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이유를. '곤이 가비를 껴안은 채 일어섰다. 여전히 가비를 뚫어져라 응시하며 걸음을 성큼성큼 옮긴다.'“어 어디 가는 거야?”'“여기서 사랑을 나눌 수는 없다.” '“그럼?”'“…….”'가비는 슬슬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조금 있으면 미명인데,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이 많지 않은데. 도대체 어딜 가는 거야? '가비를 안은 채 부락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처음 두 사람이 만났던 해변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여전히 처음 보았을 때처럼 통나무집이 서 있었다. '“저 집, 그대로 있었네? 어 어떻게 된 거야? 네, 네가?”'“그래. 우리의 추억이 담겨 있으니까.”'곤이 씩 웃었다. 먹먹하다. 이 통나무집은 언제나 변함없이 이곳에 있었다. 자신이 찾아주길 기다리며. 자신을 위한 영혼의 공간, 심장의 공간을 만들어 놓고 하염없이 기다리는 사내처럼. '벌써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도 너는 고집스럽게 그때의 우리를 떠올리는 거야? 첫 마음을 준 사내. 지금도 이 사내를 연모하는 마음은 변함없으나 사랑의 형태는 시간이 지나면 바뀌는 것이다. 영혼마저 아깝지 않던 그때의 순수함이 더 이상 내게는 남아 있지 않다. '‘나도 그러고 싶었어. 그런데 곤. 세상은 나를 그렇게 너만을 사랑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어. 그것이 서글퍼. 그렇지만 이런 네 앞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그저 미안하다는 말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