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제의 가족들이 서울로 돌아가고 태제와 보영의 집은 다시 전처럼 교동의 고즈넉함에 묻혔다. 떠들썩한 분들은 아니었지만 저녁마다 불려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보영에게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아무리 편하게 대해주신다 하더라도 보영이 아직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던 탓이었다.'오랜만에 한가로운 일상으로 돌아온 보영은 작업대 앞에 앉아 달력을 보며 날짜를 가늠하고 있었다. 혜찬의 생일이 닷새밖에 남지 않았으니 이제 슬슬 약속한 북극곰 만들 차비를 시작해야 할 것 같았다.'정말 태제와 자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도록 커다란 인형을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선물을 받고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질 혜찬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졌다. 비록 손품이 만만치 않게 들겠지만, 혜찬을 만나고 처음 맞는 생일이니 그 정도 수고로움은 감수하고 싶었다. 보영은 수첩을 꺼내 필요한 물품들을 이것저것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그 때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고, 보영은 손만 뻗어 폴더를 열었다.'“여보세요.”'-나예요, 보영 씨. 지금 바빠요?'“음, 아니요. 바쁜 일 없어요.”'-그럼 좀 나올 수 있어요?'“왜냐고 물으면 대답해 줄 거예요?”'-아뇨. 만나서 얘기해 줄게요.'장난기를 품은 태제의 목소리에 보영은 슬그머니 웃고 말았다.'“알았어요. 멀리 가야 해요?”'-좀 시간을 잡아먹을 거리죠. 딱 십 분만 기다리면 그 앞으로 갈 수 있는데.'“그래요, 그럼 십 분 후에 봐요.”'전화를 끊은 보영은 쓰던 메모를 마무리하고 외투를 챙겨 입었다. 난로를 끄고 문단속을 마치자마자 태제의 차가 미당 앞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보영은 태제가 내리기 전에 얼른 조수석으로 올라탔다.'“에이, 타지 말고 기다리고 있으면 내가 열어 줄 텐데요.”'“추운데 그럴 필요 뭐 있어요.”'“그래도요.”'“나중에 봄 되면 매일 해주세요. 됐죠?”'“쿡, 알았어요.”'능숙하게 핸들을 조작해 골목을 빠져나온 태제는 한동안 운전에 열중했고, 보영은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꼭대기에 하나 둘 매달린 마른 잎사귀들이 을씨년스럽게만 보여 보영은 미미하게 이마를 찌푸렸다.'“왜 그래요?”'“뭘요?”'“방금 이마 찌푸렸잖아요. 뭐 불편해요? 아니면 어디 아픈 거예요?”'운전에 열중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보영은 저를 걱정하는 태제의 말투가 싫지 않아 슬쩍 어리광을 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