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도 습기도 구름도 없는, 풋풋하게 맑은 날씨였다.'서은이 걸음을 옮겨 놓을 때마다 발끝에 먼지가 폴폴 일었다. 역을 빠져 나오며 읍내로 향하는 길을 뒤로 하고 비포장도로를 택한 탓이다.'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만한 좁은 오솔길은 봄이나 가을이 가장 걷기 좋을 때였다. 길가에 제멋대로 피어 늘어선 들꽃들과 조금 더 키가 큰 나무들은 서로 잘 어우러져, 멀리로 내려다보이는 마을의 풍경을 자못 평화롭게 만들어주었다.'서은은 어릴 적부터 사람이 드문 이 길을 좋아했다. 하지만 오늘 같은 날은 걷기가 얼마쯤 고달팠다. 여름이 막 시작되려는 6월 초입이었던 것이다.'머리 위로 내리 꽂히는 햇살이 몹시 뜨거워서 서은이 눌러쓴 모자 안쪽이 땀으로 바작바작 젖어 들었다. 서은은 걸음을 멈추고 후,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오빠한테 먼저 갈 걸 그랬나.'서은은 오빠가 있는 읍내의 공방으로 가지 않은 걸 잠깐 후회했다. 다시 발을 옮겨 놓으려는데 뒤편에서 천천히 굴러오는 바퀴 소리가 들렸다. 서은은 고개를 돌렸다. 승용차였다.'서은이 걸어온 길을 되짚어 아주 느린 속도로 굴러오는 자동차. 그 흰 빛깔이 햇빛을 받아 부시게 번쩍거렸다. 서은은 눈을 가늘게 뜨고 서서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차를 바라다보았다. 차는 서은 바로 앞에서 조심스럽게 멈췄다.'태워달래야겠다.'서은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역시 머뭇거리듯 느리게 차창이 올라갔다. 서은은 고개를 숙여 차 안에 탄 사람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차 안의 남자가 서은을 쳐다보았다. 무표정한 시선이었다. 서은은 좀 무안해져서 생글거리던 미소를 입 안으로 모아 들였다.'“이 길을 따라 가면 하빈읍으로 나가는 길이 있습니까?”'남자가 물었다. 정중하지만 단단하고 차가운 어조였다. 아마도 길을 잘못 든 게 분명했다. 국도로 접어들어 오른쪽이 읍내로 난 길인데 이 길은 왼쪽이었다. 외지인인 모양이었다. 서은은 푸푸 웃었다.'“하빈읍은 반대쪽인데요. 이리로 계속 가면 하빈마을이에요.”'남자의 미간에 내 천 자가 그려졌다.'“읍내 가시게요?”'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어쩌나. 여기선 차를 돌릴 수가 없는데.”'서은은 차창 틈에 팔을 얹고 남자와 차 안을 들여다보았다. 이미 서은을 외면한 남자는 입을 꾹 다문 채 앞만 바라보았다. 남자의 옆 자리엔 커다란 책이 몇 권. 언뜻 보기에 화집 같았다. 표지엔 청동의 조각상이 날카롭게 박혀 있었다.'“있잖아요,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