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내려 주세요. 걸어 갈 수 있어요.”'난 왕의 팔 안에서 버둥거리며 말했다.'“안다. 비가 걸어 갈 수 있다는 것은 잘 안다. 하지만 지금 비를 안고 있는 것이 너무 좋아서 놓아주고 싶지 않다. 그러니 가만있으라.” 왕은 나를 더더욱 꼭 껴안으며 말했다. 난 가만히 왕의 품에 안겼다. 그런 내가 마음에 드는 듯 왕은 싱긋 미소 짓더니 나의 이마에 가벼운 키스를 한 후 침실로 향했다.'침실에 도착하자 시종과 시녀를 물린 왕은 나를 침대에 걸터앉혔다. 그리고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내 발에 신겨진 비단신을 벗겼다.'“폐, 폐하! 이러시면!”'난 당황해서 발을 빼려 했다. 하지만 왕은 내 발목을 단단히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벨벳의 버선이 신긴 내 발을 두 손으로 감싸고 고개를 숙여 내 발등에 입을 맞췄다. 순간 내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천상천하 그 누구보다 강하고 그 누구보다 존귀한 아칸의 대 군주 이안 카헬 14세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내 발등에 키스하다니! 지금 이 광경을 보았다면 노회한 대신들은 당장 내 목을 치라고 아우성들이었을 것이다.'“폐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어찌 이러십니까?”'난 당황과 또 뭔가 모를 두근거림을 억누르며 발을 빼내려 버둥거렸다. 하지만 단단히 잡힌 내 발은 꼼지락거릴 뿐 왕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내게 비가 얼마나 소중한지, 얼마나 고귀한지, 깨닫게 해 주고 싶다. 비, 그댈 처음 만났을 때 난 결코 비의 목에 상처 입힐 생각은 없었다.” 왕이 변명하듯 말했다. 하지만 난 이미 왕이 변명하는 바를 알고 있다. 내 목에 피를 낸 것이 그의 생각이 아니었다는 것을 대마법사의 생각을 읽은 나는 이미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왕은 그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나 보다.'“비, 그댄 믿지 않겠지만 난 잠든 그댈 안고 싶진 않았다. 그대가 원하지 않는 짓은 결코 하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비, 난 그대가 다시 사라지는 것이, 죽을 만큼 고통스런 일을 겪은 그곳으로 가서 또 다시 고통스러운 일을 당할까봐 미치도록 두려웠다. 그래서 그대를 곁에 둘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밖에 없었어, 다시 비의 몸에 상처를 입히는 짓 말고는 말이야. 하지만 지금 생각하니 잠든 그대를 품는 것이 가장 큰 상처를 입히는 짓이었어.”'후회가 가득한 눈빛으로 한탄하듯 속삭이며 왕은 내 발에서 벨벳 버선을 벗겼다. 난 왕이 만들어 내는 후회 어린 슬픔과 색정적인 음란함이 얽힌 기묘한 분위기에 홀려, 꼼짝 못한 채 침만 꼴깍 삼키고 있었다.'“그런데 비, 난 어이없게도 잠든 그대를 취하면서 더할 수 없는 쾌락을 느꼈다. 난 비열했다. 그대가 겪을 고통에 안타까워하면서도 그대가 깨지 않더라도 이렇게 품을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다고 느낄 만큼 그대를 취하며 쾌락에 빠져있었다. 난, 난 정말 최하의 인간…….”'왕은 죄책감에 잠긴 듯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부드러운 손길로 벨벳 버선을 다 벗긴 왕은 내 맨발을 손으로 감싸고 쓰다듬었다. 그리고 뺨에 대고 얼굴을 비볐다. 난 움찔하며 다시 발을 빼려 했으나 왕은 놓아주지 않았다. 아니 내 발등에 자잘한 키스를 퍼붓는다. '“비의 발은 마치 아기 발처럼 작다. 내 한 손에 쏙 들어온다.”'키스를 멈춘 왕이 얼굴을 들고 부드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힘찬 두 손은 소중한 듯 내 발을 어루만지고 있다. 그런 왕의 두 눈에 간절한 무엇이 어렸다.'“비, 내게 그대의 꽃잎 같은 입술을 주지 않겠는가? 달콤한 입맞춤을 허락해 주면 안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