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후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서영을 쳐다봤다.'서영은 지후가 기억하고 있던 모습 그대로였지만 모습만 그대로일 뿐 눈빛은 예전 따뜻함과 수줍음에 담뿍 담겨 있던 그것이 아니었다. 따뜻함과 수줍음이 담겨 있던 서영의 눈에는 적대감과 냉소만이 서려 있었다.'“실장님, 윤서영 씨께서 오셨습니다.”'인터폰을 통해 비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을 때 지후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었다. 윤서영이 찾아왔다? 온다는 연락을 받은 적이 없었다. 윤서영은 물론이고 회장님에게서조차 언질을 받은 것이 없었다. '지후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비서실로 나가는 문을 열어젖혔다. 문 앞에는 정말 윤서영이 서 있었다. '단정하고 깔끔한 윤서영.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도시적인 세련됨과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을 가진 여자. 6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서영의 모습에선 더 이상 앳된 장난기는 찾아볼 수 없었지만 단아한 아름다움은 지나간 세월만큼 농익어 있었다. '“안녕하세요, 강 실장님.”'서영이 먼저 인사했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음성이었고 표정은 미간에 짜증 섞인 주름이 잡힌 것을 보니 썩 반가워하는 것 같지 않았다. 반갑지 않을 것이다. 반가워하려야 할 수가 없는 관계니까. '“안녕하세요.”'지후도 긴장 때문인지 건조한 억양으로 인사했다. '“바쁘신 줄은 알지만 20분만 시간 내주세요.”'서영이 차분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 음성 속에서 분명 호전적인 짜증스러움이 배여 있었다.'“들어오시죠.”'지후는 문을 활짝 열어 주었고 서영은 시간을 내주어 고맙다는 뜻으로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지후의 비서인 박 비서를 잠깐 쳐다본 후 지후를 지나쳐 사무실로 들어갔다. '지후는 서영이 자신의 앞을 지나칠 때 이름을 알 수 없는 향긋한 향기를 맡았는데 향수는 아닌 듯했다. 샴푸나 비누일 것이다. 아니 화장품 냄새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꽤 좋은 냄새였고 마음에 드는 향이었다. '“차 줘요.”'지후가 비서에게 말한 후 사무실 문을 닫고 서영을 쳐다봤다. 아담한 체구의 서영은 자리에 앉지 않고 소파 곁에 서 있었다. 지후가 앉으라고 말해 주길 기다리는 듯.'“앉으세요.”'지후의 말에 서영이 자리에 앉았고 지후는 서영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오랜만입니다.”'지후가 먼저 말했고 서영이 그러네요 하고 대답했다.'서영은 굉장히 깨끗한 피부를 가진 여자였다. 콧잔등과 오른쪽 볼에 옅은 점 몇 개가 보였지만 오히려 그 옅은 점이 서영을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끔 했다. 티 하나 없이 완전하게 깨끗하다면 사람이라기보다는 마네킹을 보는 기분일 테니까 말이다. '서영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마주 보는 것은 오늘이 세 번째였다. 세 번을 제외한 대부분은 주의 깊게 보지 않거나 먼발치에서였고 그 마저도 아주 잠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서영과의 첫 번째, 두 번째 만남이 썩 유쾌하지 못한 기억을 남겼기 때문에 지후는 서영이 직접 찾아올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언젠가는 아니 곧 서영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서영이 연락도 없이 직접 찾아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서영과의 두 번의 만남이 지후에게 불쾌함에 가까운 기억을 남겼다면 서영에게는 그 두 번의 만남이 기억조차 하기 싫을 정도로 끔찍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지후는 불쾌하고 서영에겐 끔찍한 만남 이후 제법 긴 시간이 흘렀다. 지후는 내내 외국지사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서영과 부딪힐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서영과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정식으로 대면하자 지후는 진땀이 나는 것을 느꼈다. '서영은 지후가 몸담고 있는 정일 그룹 사주의 맏딸이자 그리고 곧……. '“밖에 계신 비서…… 박정준 씬가요?”'“맞습니다.”'지후의 대답에 서영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박정준이 강지후 기조실장의 비서라니. 참 놀라운 일이었다. '서영은 기막힌 심정은 접어두고 곧 본론으로 들어갔다.'“아시죠?”'서영이 물었다.'지후는 서영이 무엇을 아냐고 묻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서영은 잠깐 지후를 쳐다보다가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쩐지 지후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이 겁이 났다. '이런 감정을 ‘겁’이라는 단어로 표현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지후는 무의식적으로 서영이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고 그 힘은 아마도 과거에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났던 일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강지후로부터 철저하게 무시당해야 했던 과거의 일.'“그 일 때문에 오셨습니까?”'지후가 정중한 어조로 물었다. '서영이 과거의 관계를 배제하고 철저하게 강 실장으로 대하고 있기에 지후 역시 그렇게 대할 수밖에 없었다.'“네.”'서영은 짧게 대답한 후 잠깐 생각하는 듯 입을 다물고 있었다.'“하실 말씀 있으십니까?”'지후의 물음에 다른 쪽으로 시선을 피하고 있던 서영이 지후를 쳐다봤다.'“아버지께서 강 실장님을 깊이 신뢰하고 계신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일로 뵙게 될 줄은 몰랐어요.”'“나도 그렇습니다.”'“물론, 그쪽에서 거절하시겠죠?”'서영이 신중한 표정으로 물었다.'순간 지후는 당황했고 그래서 즉답을 피한 채 서영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거절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