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란 작자가 죽은 날은, 비가 내렸었다. 바로 오늘처럼.'주룩주룩 내리는 창밖의 비를 바라보며 그는 떨리는 손을 다시 들었다. 작은 잔에 담겨있는 데킬라는 빠르게 몸속으로 침투해 들어왔다. 화끈함과 강렬함을 남기며. '의외로 괜찮은 맛이라는 생각이 들자 그는 쓰게 웃었다. 이래서 아버지는 이 술만을 끊임없이 들이켰던 걸까. 다 떨어지면 어린 아들더러 훔쳐오라고 두들겨 팰 만큼, 이 술이 좋았던 걸까.'이랬든 저랬든 간에 13년 전 오늘처럼 비 오던 날 밤, 누군가를 위협해서 훔친 돈으로 술을 사러가던 아버지는 어떤 트럭에 치여 죽어버렸다. 그리고 지금, 아들은 그런 아버지를 떠올리며 그렇게 당신이 좋아하던 데킬라를 대신 들이키고 있었고.'한심했다.'이깟 술 때문에 어린 아들을 버린 아버지가, 아버지만큼 혐오하는 술이면서도 셀 수도 없을 만큼 퍼마시고 있는 자신이. 하지만…… 뭐라고 해야 되나. 중독되고 싶다고 할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버지란 작자의 행태가 이해될 만큼 데킬라라는 이 술이 좋았다. 생명이 꺼져갈 때까지 중독되고 싶을 정도로.'그는 다시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술병을 들었다. 하지만 후들거리는 손에 쥐어지는 술병은 처음과는 다르게 가벼웠다. 비었다는 뜻. 그만 마셔야 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면서도 그는 저 옆에 서 있는 바텐더를 불렀다.'“경감, 그만 마시지 그래요?”'흐릿한 시야로 바텐더가 걱정하는 표정을 짓는 게 보였다. 그는 잘생긴 미간을 찌푸렸다. 경감? 내가 경찰이었나?'“이 독한 걸 이만큼이나 마시다니. 그만 마시고 집에 가요. 벌써 새벽 3시라고요.”'“아아, 됐어. 한 병 더 줘.”'“하지만…….”'그가 노려보자 차디찬 시선에 눌린 바텐더는 투덜거리면서도 바(bar) 위에 한 병을 더 올려놓았다. 그는 만족하며 두 병째의 데킬라를 쥐었다. 그때, 갑자기 어떤 손이 나타나 술을 빼앗아갔다.'그는 인상을 쓰며 몸을 홱 돌렸다. 지진이라도 났는지 세상이 온통 흔들거렸지만 어떤 여자가 바로 옆에서 자신의 술병을 들고 있는 것은 똑똑히 보였다.'동양인. 여자는 까만색의 머리칼과 눈동자의 동양인이었다. 하얗지는 않지만 남자로 하여금 핥아보고자 하는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진주빛 피부를 가진.'“흐으음…….”'“뭐가 흐으음이야?”'여자는 퉁명스럽게 내뱉으며 동시에 예쁜 얼굴을 찡그렸다. 아니, 예쁜 건 아니었다. 여전히 정신없었지만 그는 생각을 수정했다. 여자는 예쁘지 않았다.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