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도 끝에 커다란 문이 주는 고급스러운 분위기는 다른 룸과는 차별화 되어 있음을 압도적으로 알려주는 듯했다. 그 문을 여는 순간 고풍스런 느낌이 확 묻어나는 복도가 또 등장했다. 그 복도를 지나면 예쁜 보랏빛 천과 색다른 디자인의 쿠션들이 놓여 있는 소파가 보이고, 그 앞에 검은 원목탁자가 꽤 멋스럽게 자리하고 있다. 그 뒤로 커다란 나무로 경계를 지어 놓은 식탁도 비춰졌다. '그 식탁에 위에는 화려한 안주와 와인이 놓여 있었고, 식탁의 주인공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마주하고 앉아 와인을 음미하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옷차림은 상당히 언밸런스했다. 완벽한 정장 차림을 고수하는 남자와는 다르게 슬립 하나만을 걸쳐 입은 여자는 무덤덤한 표정들을 하고 와인을 홀짝이고 있었다.'“아, 지겹다. 이설희는 오는 거야, 마는 거야?”'“오겠지. 나 샤워하고 올게.”'와인 잔에 남은 붉은색을 띤 레드 와인 한 모금을 시원스럽게 들이켠 상욱이 일어나 욕실로 사라지자, 여자는 다소 싫증나고 따분한 얼굴로 담배 하나를 꺼내 물었다. 담배에 불을 붙임과 동시에 욕실에서는 시원한 물줄기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샤워 소리에 자조적인 미소를 짓던 여자는 한동안 계속해서 담배를 피워댔다. '3개비 째. 다선은 마지막 담배 한 모금을 길게 빨고는 미련 없이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리고는 길게 늘어진 머리를 다시 질끈 묶고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바닥에 떨어진 스커트를 들어 올리는데, 욕실에서 상욱이 타월로 아랫도리를 가린 채 빠져나왔다. '짧은 듯 긴 머리에 잔 근육들이 마치 조각처럼 짜임새 있게 자리 잡은 몸매, 구릿빛 피부, 깊고 날카로운 눈빛, 거기에 오만하게 자리 잡은 콧날까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존재 자체만으로 빛이 나는 상욱이 젖은 머리카락을 말리며 침대에 걸터앉자,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그에게 다가갔다.'“나 갈래.”'“기다려, 박다선.”'“대체 이걸 왜 해야 하는 거야?”'“재밌잖아.”'“재미?”'‘재미’ 라는 단어를 제대로 알고 쓰는 건지 모르고 쓰는 건지, 말을 내뱉는 입과는 달리 그의 표정은 싸늘 그 자체였다. 그런 남자를 황당하게 바라보고 있던 찰라,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이 기다리는 그녀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제야 오냐는 듯한 짜증이 묻어나는 얼굴인 다선과 달리, 그제야 정말로 재미있는 장난감을 받아든 아이처럼 작은 흥분까지 이르는 표정으로 상욱이 일어나 호텔 룸 문을 열어 주었다. '문틈으로 들어오는 다리를 발견한 다선은 피식 조롱 섞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얗다 못해 투명하기까지 한 가느다란 발목은 곧 부러질 것만 같은, 그러나 아주 날카롭게 뾰족한 마놀로블라닉의 킬 힐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그녀가 왔음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언제 짜증을 냈었나 싶을 정도로 얼굴 가득 미소를 담고 있던 다선은 마치 재미난 구경에 설레는 아이처럼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그런 다선을 묵묵히 바라보던 그녀, 설희가 먼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어 상욱을 바라봤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다선의 눈빛이 불쾌하기 짝이 없다는 듯한 표정도 동반했다.'“왜 불렀어요?”'“선글라스 안 쓰고 왔어? 사람들 눈에 띄면 어쩌려고. 대한민국 톱 여배우 이설희가 호텔방을 드나든다, 기사 나면 어떡해? 내가 아무리 힘이 좋아도 그것 못 막아 주지. 이설희 씨.”'표정 하나 없는 싸늘한 얼굴로 칼날 같은 눈빛을 한 상욱의 조롱 섞인 말투에, 설희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이겨 깨물었다. '6개월 동안 매번 반복 되는 일이었다. 몇 시간 전에 그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 굳이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는 장면을 그는 늘 그녀에게 비춰 주고 있었다. 호텔방에서 남자는 샤워를, 여자는 슬립을 입고 있다면 그들의 시작은 눈감고도 알 수 있는 사건이었다. 절대로 상대 여자에게 들키지 않으려 꽁꽁 숨겨 하는 이 일을 그는 매번 너무도 뻔뻔스럽게 설희에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 그의 거침없는 행포에 설희는 지쳐가고 있었다. '이런 일에 반응하는 자신을 보고 더욱 재밌어할 남자임을 알면서도 설희는 자신도 모르게 퉁명스럽게 말을 던졌다. '“걱정 말아요. 그런 일, 일어날 리 없을 테니까.”'“아하. 잘난 아버지 덕이신가? 그럼, 나 같은 일개 기획사 사장이 뭐 걱정할 필요도 없었네.” '“용건이나 말해요. 왜요?”'“결혼. 하자구.”'모든 시간이 멈춘 듯했다. 이곳에는 그 어떤 시간도 흘러가지 않고, 공기마저 멈춘 것 같은 느낌이 설희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곧 모든 것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디디고 있는 이 공간과 눈앞에서 잔인한 표정을 하고 서 있는 이 남자, 그리고 자신이 들었던 그의 음성. 모든 것이 순간 설희는 의심스러웠다. '지독하리만큼, 철저하게 얼음인간보다 더 차가운 사람이라는 것 정도는 알았지만 이 정도일지는 설희는 꿈에도 몰랐다. 몇 시간, 아니 몇 십분 전까지만 해도 다른 여자를 품에 안고 신음을 했을 이 남자가 너무도 태연한 얼굴로 당연하다는 듯 자신에게 결혼을 요구했다. 어이없음을 넘어서 황당함을 넘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주 큰 종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져 멍해져 버린 머리처럼 설희는 자신이 입을 달싹이는지조차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얼굴로 상욱을 바라봤다.'“결혼, 이라고 했어요?”'“다시 말해 줘야 하나? 맞아, 결혼해 줄게.”'너무도 담담한, 아니, 너무도 칼날 같은 그의 말이 설희의 가슴 깊은 곳까지 집요하게 후벼 팠다. 두 사람만 있는 자리가 아닌, 그와 함께 호텔방을 드나드는 여자 다선 앞에서 너무도 무책임하게 말을 던지는 상욱의 행동에 설희의 심장이 울컥했다. '이 남자 앞에서, 적어도 약혼녀 앞에 당당한 얼굴로 앉아 마치 원숭이를 구경하듯 앉아 있는 저 여자 앞에선 울지 말아야지, 라는 생각에 설희는 입술을 짓이겨 깨물었다. 지독했다. 대체 왜 자신에게 이러는지 그 이유조차 알지 못하고 당하는 일. 그를 사랑하니까, 이 남자를 20년 동안 기다렸으니까, 왜 이렇게 자신을 괴롭게 하는지 이유조차 모르지만 참을 수 있었다. 그를 사랑하니까. 그러나 이 생활이 6개월째 접어들자 설희 그녀도 점점 지쳐가기 시작했다. '이유 없는 고문은 상상보다 더 독하고 무서운 상처였다. 왜 자신에게 최상욱이라는 남자는 이렇게 싸늘한 눈으로 칼날을 꽂는지, 왜 자신은 이런 남자를 사랑하고 있는 건지, 왜 자신을 이렇게 미워하면서도 최상욱은 이설희를 곁에 두려 하는지……. '너무도 뻔뻔한 얼굴로 결혼을 이야기하는 이 남자에게 설희는 애써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