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층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문을 닫은 서영은 방바닥에 앉은 조카를 향해 V자를 가리켰다.'“지호야. 시작하자.”'“응응, 얼른 와. 이모.”'“쉬잇!”'올해 여섯 살 난 지호가 신이 나서 외치자 서영은 서둘러 조카의 입을 막았다.'“네 외할머니 아시면 큰일 난다. 조용히……조용히…….”'“알았어.”'여섯 살 답지 않게 영특한 지호가 두 눈을 찡긋거리며 고사리 같은 손에 컵을 들었다. 서영이 엄마의 신주단지 포도주 병을 들어 따랐다.'“이모, 넘치면 안 돼.”'“어유, 넌 왜 그런 걱정을 해? 이모가 얼마나 능숙한 테크니션인데.”'그녀는 연령을 생각해 지호의 소주잔에는 1/5만 따르고, 바닥에 놓인 잔에 찰랑찰랑 할 정도로 따른 뒤 잔을 들었다.'“자, 건배.”'“응, 이모 건배.”'두 개의 소주잔이 허공에서 짠하고 부딪쳤다.'“우와, 저엉말 맛있다.”'“캬. 그렇지, 그렇지?”'지호와 서영은 잘 익은 포도주의 맛에 반해 신이 났다. '“이모가 밤마다 훔쳐 먹는 거는 내가 외할머니한테 비밀로 해 줄게.”'“고맙다, 지호야.”'바로 어젯밤, 2년 묵은 포도주 병에서 커다란 머그잔에 한 컵 따르는 것을 지호에게 들켰던 서영은 가슴에 올려 졌던 돌을 내려놓은 듯 했다. 아버지를 위해 온갖 사랑과 애정으로 빚은 엄마의 귀하디귀한 포도주를 고방에 쥐처럼 들락거리며 훔쳐 먹었다는 사실이 들통 나는 날에는 이 세상 하직이다.'“이모, 나 쪼끔만 더 주면 안 돼?”'“안 되긴. 더 먹어, 더.”'서영은 너무 신이 나서 목소리가 방문을 넘어선 것도 몰랐다.'“뭘 더 먹어!”'헉, 포도주가 가득 든 항아리를 들던 서영은 갑작스럽게 들리는 엄마의 목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홱 돌아보자 도끼눈을 한 엄마가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정.서.영. 너!”'스타카토 발음으로 딱딱 끊어지는 음성을 들은 서영의 몸이 자동적으로 굳어졌다. '“어, 엄마.”'“할머니, 있잖아. 난 저얼대 안 마시려고 했는데 이모가, 이모가……마시라고 막 그래서……. 우아앙.”'“야! 내가 언제…….”'영특하다 못해 영악한 지호가 고새 엄마의 치마 자락을 부여잡고 눈물 연기를 펼치자, 서영은 기가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