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에 막혀 차가 멈추자 리은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파란색이 좋아요.”'그녀의 나직한 말에 주위를 둘러봤지만 어디를 봐도 파란색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여 말하는 그녀를 서혁의 날카로운 눈빛이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눈이 시리게 푸른색이 나는 좋아요. 감히 안을 들여다볼 용기조차 내지 못하게 차가운 벽으로 둘러싸인 그런 푸른 유리성에 살고 싶어요.”'이미 늦은 말이었다. 서혁이 금을 넘기 전에 했어야 하는 말이었다. 다가오지 말라는 경고는 그때 했어야 하는 거였다. 이제 그에겐 아무 효과도 없는 말일 것이다.'“깨버리면 그만이야. 그까짓 유리성, 부숴 버리면 그만이라고.”'단호한 서혁의 음성이 리은의 혼잣말을 깨버렸다. 시선을 돌리자 운전대를 잡은 서혁의 손마디가 하얗게 도드라져 있었다. 그녀는 가만히 그의 손을 잡았다. 둘 모두에게 위로가 필요한 순간이었다.'“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하지 마라.”'서혁이 먼저 선수를 쳐 리은의 입을 막았다. 육감이라는 건 여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그녀의 눈빛만으로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빤히 보였다.'“만약에 당신이 나한테 등을 돌려도 원망은 안 해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거 아니까요. 그리고 사랑했던 순간만큼 당신이 진심이었다는 거, 내가 알아요. 갈림길에 섰을 때 당신이 나에게 등을 보이고자 마음먹은 건…… 그건 분명히 나를 생각해서 내린 결론이라는 걸 믿어요. 당신이 사는 세상과 내가 사는 세상은 엄연히 다르니까. 가까워지기는 했지만 결코 똑같아질 수는 없는 거니까요. 그러니까…….”'“그러니까 뭐? 그러니까 헤어지자고? 그 말이 하고 싶어?”'서혁의 목소리가 화가 난 듯 격해졌다.'“그러니까 너무 힘들면 놔버려도 된다구요.”'버려지는 게 두려웠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버려지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아니, 거짓말이다. 힘들어도 절대 놓지 않기를 바란다. 말을 뱉자마자 벌써부터 심장이 멎을 것처럼 둔탁해졌는데 놔도 된다는 건 순전히 거짓말이다.'“유리은, 지금 이 순간 니가 처음으로 미워지려고 하는 거 알아?”'서혁은 그대로 입을 닫았다. 앞을 보면서 운전에만 열중했다. 잡고 있던 손도 뿌리친 채 그는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날이 선 옆모습만 보여주었다. 가는 줄 위에 아무것도 들지 않고 그저 팔만 벌려 중심을 잡고 있는 사람처럼 그의 얼굴은 아슬아슬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