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2년 3월(경종 2년) ''날이 어스름해지는 것이 곧 비가 올 것만 같아 영인은 수틀을 물리고 일어섰다. 마루에 나와 가만히 서 있으려니 여러 생각이 떠올랐다. 옥에 갇혀 있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잔뜩 어두운 얼굴로 한숨을 쉬고 있던 그녀는 문득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녀에게는 먹구름으로 가득한 하늘이 왠지 불길하기만 하였다. '마루에 서 있던 영인에게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신을 신고 소리가 나는 곳으로 걸어갔다. 시끄러운 소리를 따라가 보니 사랑채가 나왔다. 오라버니 친구들이 왔나 보았다. '사랑채 마당으로 들어간 영인은 눈을 찡그리며 생각에 잠겼다. 왜 그를 볼 수 없는 걸까? 한 달 전까지만 해도 하루가 멀다 하고 드나들던 사람이 발걸음을 뚝 끊어버린 게 아무래도 이상했다.'영인은 숨을 죽이고 사랑채에서 나는 목소리들을 들어보았다. 남자치고는 가늘고 높은 톤의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으로 그녀가 막 돌아서 나가려는데 사잇문 앞에서 그녀를 응시하고 있는 그가 보였다. 젠장,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거야? 낮은 소리로 욕설을 내뱉은 그녀는 얼굴을 붉히지 않으려 애를 쓰며 그를 쏘아 보았다. '“도도하신 영인낭자께서 도령들 사랑방이나 염탐하고 있다니 해가 동쪽으로 지려나 보오.”'흥! 그러면 그렇지. 그렇게 비꼬아야 홍운 도령이지. 지금 영인에겐 그의 그 비틀린 말투조차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소녀도 이제 열여덟, 혼인할 때가 되었으니 어찌 도령들에게 관심이 없을 수 있겠어요?”'“하! 사랑방에 모여 있는 도령들 중에 낭자에게 청혼할 이는 없을 것 같은데?”'뭣이라? 내가 뭐가 어때서? 하는 말을 애써 삼킨 영인은 생긋 웃으며 그에게로 다가갔다.'“제 어디가 그리 부족하더이까?”'“몰라서 묻소? 낭자의 그 도도하고 잘난 성질머리를 그대 오라비 동기들 중 모르는 이가 없다오.”'“제가 내숭을 떨 줄 몰라서 그렇겠지요.”'“헛, 낭자의 그 뻔뻔함에 식상한 나머지 한동안 오지 않았더니 오는 날이 장날이 되었군.”'홍운이 ‘쳇’하고 혀를 찼다.'“그거 아세요? 도련님의 세치 혀는 그 뺀질한 얼굴과 어찌 그리 잘 어울리시는지요?”'영인은 머리끝까지 화가 뻗치는 걸 간신히 억누르며 그렇게 톡 쏘아댔다. 그리고는 고개만 까딱한 뒤 쌩하니 돌아섰다.'그녀가 통쾌하게 미소를 지으며 두어 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갑자기 어깨를 억세게 잡는 느낌에 그녀는 확 소름이 돋았다. 그가 우악스럽게 그녀를 확 돌려세우더니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그녀에게 돌진해왔다. 그녀의 입술로 말이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영인은 어찌할 틈도 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혀가 그녀의 입속으로 사정없이 들어와 움직였다. 영인은 그의 등을 때리며 발버둥 쳤다. 하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그를 밀쳐낼 수가 없었다.'그가 그녀의 입술에서 갑자기 확 떨어졌다. 그 바람에 영인은 제대로 서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그 찰나의 순간 홍운이 그녀의 허리를 받쳐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