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린 그녀 ''''''잿빛 강 끝에서 몰려온 바람은 숲처럼 버티고 선 갈밭에 이르자 순식간에 길을 잃은 듯 갈대보다 제가 먼저 흔들렸다. 흔들린 바람들은 갈 숲의 속살을 파고들어가 고요한 갈대의 바다를 유영했다. 이 끝에서 저 끝으로 한달음에 밀려드는 갈대의 물결은 흡사 바다의 요동처럼 보였다.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일렁거림. 바람은 수없이 달려와 흔들어보지만 그 일렁임의 끝을 볼 수는 없다. 여린 갈이파리들은 바람에 쉬이 흔들리지만 바람이 멎으면 언제나 재빠르게 제자리로 돌아와 부르르 떨며 떠날 수 없는 자신의 뿌리를 슬프게 내려다보았다.'그 끝이 어디쯤인지 가늠할 수 없는 긴 둑길은 안개 속에 꼬리를 감추며 언덕 아래의 물결치는 갈대 속으로 사라졌다. 한 무리의 바람이 몰려와 요동치는 갈밭은 물빛과 달빛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그곳이 처음부터 뻘이었는지, 아니면 강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가을이 되면 흐드러지는 갈대 덕에 해마다 젊은 사람 서넛은 가슴이 무너진다고, 나이 지긋한 노인들은 그곳을 지날 때면 눈길도 주지 말라는 말을 했다. 유난히 키가 크고, 대가 굵은 그곳의 갈대는 밖에서 보면 부드러우나 안으로 들어서면 잎들이 거칠고 날카로워 살을 베이기 일쑤였다.'그래도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이 많은지 곳곳에 조그만 길들이 나 있었고, 둑길을 지날 때면 바람이 잠든 날에도 그곳에서는 여전히 바람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흡사 오랜 전설의 소리처럼 낮고, 고요하고, 뿌리 깊게 들렸다. 사람들은 그곳을 젊은 한때 누구는 사랑이 영글었고, 또 누구는 한 목숨 그저 가벼운 갈이파리처럼 꺾어버리기도 했던 곳이라고 했다. 달빛 부서지는 밤이나 비가 쏟아지는 날에는 그 소리가 둑을 거슬러 올라와 오랜 전설 같은 그들의 이야기들을 긴 둑길 위에 흩뿌리곤 했다.''8월도 한가위, 만월의 밤이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게 뻗은 둑길 아래로 한창 물이 오른 갈대들이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풀벌레 소리 요란한 그곳을 조심스레 걸어 들어오는 그림자 하나가 있다. 달빛 아래에서도 반짝이는 비단 옷에 뽀얀 얼굴이 한눈에 대갓집 규수임을 짐작케 했다. 달빛은 쏟아질 듯 부서져 내리고 갈대들은 뻣뻣이 뻗은 몸을 드러내며 푸른 안개에 밑둥치를 담그고 있었다. 어느새 이슬이 내려앉았는지 손끝이 스치는 곳마다 차가운 물기가 묻어나왔다.'''''2. 젊은 그들''3. 이슬처럼 젖어들다''4. 떨어지는 꽃잎''5. 생명의 은인을 만나다''6. 칼을 품다''7. 시간의 이끼들''8. 돌아눕다''9. 장평과 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