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린은 티켓을 들고 지정된 좌석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두리번거렸다. 출발 직전에 덜렁대다 겨우 올라탄 기차의 대부분의 좌석은 이미 승객들로 만원이었다. 예린의 서울 살이를 위한 짐은 부산댁이 이미 서울로 붙여 놓은 상태였지만, 부칠 수 없는 짐은 가녀린 손목으로 낑낑 거리며 들어야했다. 여기서 부칠 수 없는 짐이란 예린에게 소중한 물건을 뜻한다.'예린이 기차가 올라타자 여기저기서 관심어린 시선들이 그녀에게 쏠렸다.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힐끔 보는 소년이 있는가하면, 얼굴을 붉히는 건장한 군인도 있었다. 어깨 밑으로 내려오는 찰랑거리는 생머리와 아담한 키에 한국무용을 전공한 가녀린 몸매로 보호본능을 일으킬 만큼 가늘고, 뽀얗고 보송보송한 피부에 외꺼풀의 길쭉한 눈매, 사슴같이 순수한 눈망울을 가진 그녀에게서는 또래 남자애들을 비롯하여 남정네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아! 띠! 기집애. 서울에 사는 것이 입은 또 얼마나 까다로운지. 뭐? 대변시장에 가서 말린 가자미를 사오고, 멸치육젓도 사오라고? 저번에 놀러왔을 때 다 먹어치울 때 알아봤다. 육젓에 버무린 김치 한통에 가자미, 젓갈에 나죽네 나죽어. 괜히 아줌마한테 김치 꼭 꼭 눌러 담으라고 해서 무거워죽겠네, 에고고. 린이 죽는다. 죽어.’'여기서 그 유명한 부산식 멸치육젓 김치는 예린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다. 김치 사이사이에 반짝반짝 거리는 멸치가 빛을 발하는 20살 소녀가 좋아하기에는 거리가 있는 음식일 것이다.'커다란 가방을 든 소녀는 보기에도 힘들어보였고, 가냘픈 몸을 더 강조해서 보호본능을 일으키고 있었다. 겨우 자신의 좌석을 발견한 소녀는 털썩 자리에 앉아 숨을 골랐다. '‘15일 동안 하루에 3시간만 정 선생님이랑 연습하면 자유시간인데, 그 동안 뭘 하지? 그래. 그래. 명지랑 막걸리도 한잔 먹고. 야호! 할아버지로부터 해방이다. 신나는 서울생활!’'무거운 가방을 의자 밑에 내려놓고, 혹시나 젓갈이 흘러내릴까 노파심에 다리로 가방을 꽉 조이며, 예린은 기와집을 지었다 무너뜨렸다 행복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그것도 잠시 문득 호기심이 생겨, 옆 창가 좌석의 동행에게로 천천히 눈을 돌렸다.'‘헉’ 그녀는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루시퍼를 발견했다.'옆자리의 남자는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잘 생겼다. 아니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예린의 이상형에 일치하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대리석 같은 얼굴선에 샤프한 콧날과 남자치고는 얇지만 육감적으로 닫혀있는 입술, 닫혀진 눈을 뜨지 않아도 지성이 엿보였다. 머리는 유명헤어디자이너의 손길이 느껴지는 샤기 컷으로 마무리 되었고, 여름의 뜨거운 태양이 머리칼을 반짝반짝 빛나게 하고 있었다. '그가 입은 양복은 예린이 즐겨보는 잡지 에스콰이어에 나오는 아르마니나 제냐임이 분명했고, 잡지에 모델과 같은 샤프한 몸매에 단추 두 개가 풀린 셔츠 사이로 보이는 남자의 가슴은 탄탄해보이고, 매끄러운 실크 같은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