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만약에 나 없으면 어떻게 살래?’'‘왜, 당신 어디 가?’'‘만약에…….’'‘좋은 데 가면 나도 데려가고, 안 좋은 데면 당신 혼자 가!’'‘나 없어도 잘 살 수 있겠어?’'‘당신 오늘 왜 그래? 무슨 일 있어?’'‘아니, 그냥…….’'농담처럼 스치듯 말을 주고받은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진현은 서너 개나 되는 보험증서를 들고 와 종류별로 늘어놓으며 형경에게 이것저것 설명했다. 수혜자 성명 란에 김형경 석 자가 눈이 아프게 박혀 들어왔지만 아직 온전한 여인보다는 소녀와 같은 감성을 지녔던 형경은 그 글자를 그냥 무심히 넘겨 버렸다. '이제 막 스무 살을 넘긴 형경에게 남편 진현은 험한 세상으로부터의 울타리였고, 바람막이였으며, 또한 세상의 전부였다. 그가 있음으로 해서 그녀는 늘 든든했고, 세상의 밝은 면을 볼 수 있었고, 마음이 따뜻했었다. '언제나 함께할 거라는 달콤한 말을 형경의 귓가에 속삭이던 진현은 그 행복했던 시간을 채 일 년도 함께 보내지 못하고 혼자서만 먼 곳으로 떠나 버렸다. 장난처럼 했던, 안 좋은 곳이면 혼자 가라는 철없는 아내의 그 말을 철저하게 지키듯 이제는 볼 수 없는 곳으로 가 버렸다. '그때는 왜 그렇게 철이 없었는지, 슬퍼 보이는 눈으로 묻던 진현에게 당신과 함께라면 그곳이 어디든 나에겐 천국이라고 왜 말해 주지 못했는지, 오늘처럼 날이 훤하게 밝아 오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면 그렇게 밤새 자신을 질책했다.'아무리 철이 없다 한들 왜 그렇게 없었을까. 왜 진현에게 따뜻한 말을 해 주지 못했을까. 씁쓸한 것 같기도 했고, 외로워 보이기도 했던 그날 진현의 표정을 형경은 아직도 기억한다. '진현은 정말 뭔가를 느껴서 그랬을까, 아니면 그냥 미래를 위해서였을까. 그가 가던 날이 지금도 손에 잡힐 듯이 떠오른다. '막 대학 입학을 앞두고 만난 진현에게 형경은 한눈에 반했었다. 선한 웃음을 지으며 자상하게 주위 사람들을 챙기는 진현의 모습에 어린 나이의 형경은 온 마음을 다 빼앗겨 버렸다. 그녀는 늘 어리다고 동생 취급 하는 진현을 주야장천 따라다니며 여자로 봐 달라 떼를 썼었다. 그렇게 거의 육 개월 가까이 따라다녀 겨우 그의 마음 한 자락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그날이 올 때까지 한 번도 진현이 형경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 없이 살았다. 눈물 한 방울 흘리는 일 없이 꽃망울에 맺히는 꿀처럼 달고 또 달게 살았고, 형경은 그의 곁에서 아름다운 꽃잠을 잤다. '행복이라는 것이 이렇게 그녀의 주위에 오랫동안 평온하게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만큼 진현은 형경에게 온 정성을 쏟았다. 마치 손이 많이 가는 화초를 기르듯이 그는 항상 세심한 손길과 관심 한 자락을 형경에게 연결시켜 두었다. 형경은 진현의 그늘 안에서 세상모르고 행복하던 그때가 아직도 손에 잡힐 듯 생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