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랑거리는 바람에 꽃향기가 묻어올 것 같은 포근한 날이었다. 이제 막 4월로 들어선 날씨는 여느 날보다 훨씬 과한 양의 봄을 품고 있었지만, 서화는 요즘 종일 동동거려도 바닥을 보이지 않는 일거리들 때문에 그 봄을 만끽할 여유를 가질 수 없었다. 오늘만 해도 아침부터 몰아치는 업무의 홍수 속에서 익사하지 않고 버텨낸 것이 용할 정도였다.'서화는 직원들이 다 돌아가고 난 고즈넉한 사무실을 이제야 한시름 놓겠다는 표정으로 휘 둘러보았다. 매사에 어중간한 것은 보아 넘기지 못하는 서화의 성격상 책상 오른편에는 완벽하게 정리된 파일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사화는 매정하게 꼭 잠가놓았던 블라우스의 맨 위 단추를 푸르고 잔머리 하나 빠져나오지 않게 꽁꽁 묶었던 머리끈을 느슨하게 잡아당겼다. 소매 단추까지 푸르고 제 성격답게 깔끔하게 두 번 접어올리고 나서야 스커트를 잘 갈무리하며 자리에 앉았다.'슬슬 일에 속도를 올려야 자정이 넘기 전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이었다. 서화가 일거리를 집어 든 것과 휴대전화가 울린 것은 동시였다.'서화는 서류를 펼치고 나서야 휴대전화의 슬라이드를 밀었다.'“네, 이서화입니다.”'-어, 처제. 잘 지내는 거지?'“아아, 엄마가 해주시는 밥 꼬박꼬박 먹고 다니던 절 강원도 산골에 처박아 놓고, 본인은 와이프가 해주는 따뜻한 밥과 딸내미가 부리는 재롱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시는 분이군요. 네에, 서류에 치이다 못해 질식사할 지경이니 아주 잘 지내고 있죠.”'-하하하! 처제 독설이 여전한 걸 보니 지낼 만한가 본데. 그리고 처제는 일이 많으면 전투능력이 상승되는 사람 아닌가?'서화는 비비꼬인 자신의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치는 형부 때문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피곤에 지친 어깨가 통증을 호소하는 바람에 다른 쪽으로 전화기를 바꿔 든 서화는 벼르고 별렀던 말을 일건에게 특유의 딱딱한 목소리로 피력하기 시작했다.'“형부는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경향이 있어요. 제가 업무능력이 뛰어난 건 사실이지만 이 많은 일을 혼자 처리하기는 무리라고요. 달랑 대리 직급 하나 붙여 놓고 너무 부려먹으시는 거 아닙니까? 게다가 진드기처럼 달라붙는 형부 사촌동생이시라는 장영건 씨를 어떻게 해주시지 않는다면 이번 프로젝트는 물 건너가 버리는 거라고요! 아시겠어요? 둘 중 하나를 택하세요. 업무량을 줄여주시든가, 진드기를 떼어주시든가.”'-하하! 처제 능력이야 지난번 리조트 프레젠테이션에서 이미 검증됐잖아. 믿으니까 맡기는 거고, 실망시키지 않으리란 거 알아. 그리고 영건이는 아무리 사촌동생이라지만 내 능력 밖의 일이라고.'“후! 형부, 저는 그 사람이 정말 싫다고요. 겹사돈이라는 요상한 말로 들이대는 거 딱 질색이란 말이에요. 전 결혼에 관심 없어요. 형부한테는 미안하지만 그 남자 구시대적인 작업방식으로 치근대는 통에 신경쇠약에 걸릴 지경이란 말이에요!”'서화는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거의 소리를 지르다시피 하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결혼 전에 봤던 그 차갑고 이지적인 이미지의 일건은 이제 옛말이 되어 버렸다. 언니 서선과 조카 해랑의 일이라면 팔불출에 푼수 소리가 아깝지 않게 평범한 남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