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가 사라졌다.'―미안해요. 더 이상 못하겠어요. 용서해 주세요.'라는 단 세 문장만 남기고 그의 신부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선재는 사각으로 접어져 협탁 위에 얌전하게 놓여 있는 작은 종이를 펼쳐 보는 순간, 강한 둔기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결혼식이 끝난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신부가 달아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잠시 멍하게 있던 선재는 방을 뛰쳐나와 집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2층, 정원, 욕실, 심지어 지하 창고까지 샅샅이 뒤져 보았지만, 그 어디에도 인혜는 없었다. 아니, 애초부터 윤인혜란 여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작은 숨결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막막한 심정으로 선재는 다시 거실 한가운데 섰다. 거실은 회색빛 새벽을 배경으로 정적만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단 하루도 머물지 않았는데, 그녀가 빠져 나간 집은 무서울 만큼 시리고 황량했다. 선재는 도망치듯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침대 위에 던져 놓은 쪽지를 집어 다시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몇 번을 곱씹어 봐도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의 신부가 완전히 사라졌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노가 거친 물살이 되어 온몸을 휘몰아쳤다. 선재는 쥐고 있던 종이를 사정없이 구겼다. 결혼도 마음대로 하더니 끝내는 것도 마음대로라니!'“빌어먹을. 윤인혜!”'꽉 다문 잇새로 성난 포효와 같은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스무 살짜리 여자에게 완벽하게 농락당한 꼴이었다. 빈 허공을 노려보는 선재의 얼굴은 열기로 뜨겁게 달아올랐고, 두 눈은 붉은 핏발이 서렸다. 눈앞에 그녀가 있었다면 분명 목을 졸라 버렸을 것이다. 선재는 가슴을 꽉 막고 있는 답답함을 견디지 못해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습기를 머금은 여름의 새벽 공기가 들어와 밀폐된 방 안 공기와 뒤섞였다. 미풍에 커튼이 조금씩 흔들렸다. 마치 선재의 마음처럼……. 선재는 한참 동안 꼼짝도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격해졌던 감정이 가라앉고 냉철한 이성이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조금씩 인혜의 마음도 이해될 것 같았다. 그가 이 결혼을 얼마나 끔찍해 했는지, 얼마나 잔인한 말과 행동으로 그녀에게 상처를 주었는지도 깨닫게 되었다. 인혜로서는 당연히 달아나고 싶었을 것이다. 그 마음은 이해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다. 이렇게 허망하게 끝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선재는 창가에서 떨어져 나와 수화기를 들었다. 몇 번의 신호가 간 후, 보안실의 양 부장이 잠이 묻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지금 당장 뉴욕으로 떠나는 비행기를 알아보고, 출국자 명단에 윤인혜가 있는지 확인하고 바로 연락 주십시오.”'선재는 양 부장이 다른 질문을 할 여지도 주지 않고 본론만 말하고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선재의 생각은 또다시 인혜의 행방으로 이어졌다. 출국 확인을 지시하긴 했지만 아직 한국을 떠나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로 간 것일까? 선재는 잠시 인혜의 숙부, 윤 회장을 떠올렸다. 그러나 이내 그 생각을 떨쳐 냈다. 윤 회장은 인혜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사람이었다. 절대 그에겐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혜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은 고 변호사뿐이었다. 그는 인혜가 한국에서 유일하게 의지하는 사람이었다. 선재는 고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