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말했다.'“1번은 이 옆 테이블에 가서 속옷 보여 주고 와.”'불쑥 일어선 미애가 뚜벅거리며 남자들이 웃고 떠드는 옆 테이블로 가더니 느닷없이 입고 있던 맵시 나는 모직 스커트를 번쩍 치켜들었다. 남자들이 웃음소리가 뚝 멈춘 것도 잠시, 미애는 얼른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뭐였어, 방금?”'옆 테이블에서 하는 목소리가 다 들려왔다. '왕을 비롯한 다른 친구들이 배꼽이 빠져라 웃어댔다.'“4번은 왼쪽 옆 사람 입에 뽀뽀해.”'왕이 또다시 주문하자 두 사람 건너 앉은 남자가 곁에 앉은 채린이에게 진하게 입을 맞추었다. 남자, 여자 하나씩 끼어 앉으니 그런 주문을 한다 해도 이상한 분위기가 되지는 않았다. '재인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아직 호명하지 않은 자신의 번호, 5번만이 남아 자신의 목줄을 조이고 있다. '사실, 이런 탈선은 머리털 나고 처음이었다. 수능시험이 며칠 전에 끝났지만 이래저래 그 후유증에서 벗어난 것이 며칠이나 지나고 나서였다. '친구 몇 명이 미팅이란 것을 하잘 때도 그저 남자들 몇 명과 만나 이야기 나누다 영화관 같은 곳에 가는 것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웬걸, 잘 아는 집이 있으니 거기 가자고,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따라온 것인데, 그저 식당 같은 곳인 줄 알았더니 이런 술집에도 들어온 것이다. 혹시나 무섭게 생긴 경찰관 아저씨가 당장에라도 그녀의 머리칼을 채며 ‘어딜 들어가?’ 하고 말할 것 같은데, 떨리다 못해 가슴이 벌렁거리며 거의 호흡곤란 상태까지 왔었는데, 생각과는 달리 너무도 쉽게 들어왔다. 아는 집이라 말하더니, 알고 보니 미리 말을 해놓고 약속을 한 상태였던 것이다. '“요새는 단속을 잘 안 하니까 받아주는 거야.”'자신들을 이곳으로 안내한 그 학생과 친한 듯 주인은 등을 두드려주기까지 했다. '자신과는 달리 미애와 채린이는 아주 잘 놀았다. 마치 몇 번 해 본 듯 이 ‘왕 게임’에서 제비뽑기로 뽑힌 ‘왕’이 시킨 것도 아무 거리낌 없이 척척 해치웠다. '그러나 재인은 이상하게도 운이 따르지 않았다. 게임의 특성상 특정인물을 불러 뭔가를 시키는 것도 아니고 무작위로 잡은 번호를 불러 시키는 것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유독 어려운 주문들로, 재인이 할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솔직히, 모르는 다른 테이블에 앉는 남자의 뺨을 때리고 오라는 둥, 속옷을 테이블 위에 꺼내놓으라는 둥 하는 주문을 어떻게 들어줄 수가 있느냔 말이다. 당연히 벌주를 마실 수밖에 없었다. 벌써 왕을 네 번이나 선출했지만 하나같이 마음에 드는 주문을 한 왕은 나타나지 않았다. 하다못해 친구인 미애조차도 그녀에게 옆 사람의 무릎 위에 앉아 진한 키스를 하라는데 모르는 남은 오죽했겠는가. 더군다나 곁에 앉은 멀대같은 남자도, 두꺼운 안경에 젖살도 안 빠진 것 같은, 더군다나 이 분위기에 잔뜩 주눅이 든 모범생 타입의 재인을 상대하기 싫었는지 왕이 재인과의 ‘어떤 것’을 시킬 때마다 그저 술을 먹었을 뿐이다. 한편으로는 안심이지만 한편으로는 솔직히 자존심이 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