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자고?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형우가 대답 대신 고개를 슬며시 끄덕였다. 파혼이라는 폭탄 발언을 꺼낸 쪽은 자신이면서 여전히 우물쭈물 대다니. 리제는 피식 웃었다. 그러나 재확인은 필요했다.'“진심이란 거지?”'리제 자신에게가 아니라 형우가 그걸 확인하도록. 감히 먼저 파혼이라는 말을 꺼낸 쪽이 그였다는 걸, 그가 절대로 잊지 않도록.'“그래. 미안하지만 너하고 결혼…… 까지는 못할 것 같아. 그럴 자신은 없어.”'“자신? 무슨 자신? 우리가 해온 게 죽고 못 사는 연애였어? 양가 집안에서 만나보란 대로 만나서 이 년 넘게 만난 거잖아? 그동안은 우리가 무슨 자신을 가지고 만난 거였나?”'리제의 목소리는 어린 아이를 달래는 엄마처럼 조금은 위압적이면서도 상냥했다. 늘 그랬다. 부족한 온달을 교육시키는 평강공주라는 기분으로 형우를 구슬리곤 했다. 그러면 대개는 그녀의 말을 들었다. 아니, 대개가 아니다. 전적으로 그녀의 말에 따랐다. 그런 남자였다. 우유부단하고 소심한 모범생 외길을 쭉 걸어온 권형우란 남자는.'그런데 오늘은 그런 그가 큰 모험을 시도하고 있다. 헤어지잖다.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마실 때 뭔가 있구나 하고 짐작은 했지만, 이런 말일 줄은 몰랐다. 리제는 자존심 상하는 걸 꾹 누르며 애써 웃었다. 형우는 어설프게 따라 웃다가 그래서는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다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얼씨구. 리제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미소를 거두었다.'“너, 나한테 과분하단 거 알아. 똑똑하고, 예쁘고, 나하고 달리 패기도 있고 자신감도 넘치지. 너랑 결혼해서 네가 하란 대로만 나아가면 나도 뭔가를 이룰 거란 것도 알아.”'알긴 뭘 알아. 그런 걸 아는 약삭빠른 놈이 나한테 헤어지자고 해? 리제는 속으로 이죽거렸다. 형우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두 손을 꽉 쥐더니 또 고개를 숙이며 용서를 구했다.'“하지만 아니야. 나는 너 사랑하지 않아.”'“사랑하지 않는다라. 누군 너 사랑하니? 정략 결혼할 커플이 사랑 따져서 뭐 해? 우리가 언제는 좋아서 약혼했어? 그냥 하던 대로 살자고. 숨죽이고 부모님 말 잘 듣다가, 날 잡아주면 결혼하는 거야. 집안에서 얼마쯤 떼어주고 독립시켜주면 서로 터치 안 하면서 자유롭게 살 수 있잖아. 아주 편한 길이야. 그걸 왜 걷어차려고 그래? 그깟 사랑이 뭐 대수라고.”'거짓으로라도 사랑 어쩌고 따위의 말을 지껄이면 형우의 마음이 움직일 걸 알고 있다. 그러나 리제는 그런 말 따윈 입에 담지 않는다. 형우가 그녀를 보면서 쓸쓸한 눈빛을 짓는 걸 보고서도 리제는 꿈쩍도 않는다. 그는 늘 애정에 굶주린 강아지 같은 눈으로 그녀를 귀찮게 만든다. 정작 애정을 받고 싶어 하는 이는 따로 있는 주제에, 사랑만 해주면 누구에게나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 질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