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은색 스키니 진에 롱부츠를 신은 민수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정성들여 눈가에 스모키 화장을 했다. 오늘은 특별히 아이라인을 더 길게 그려 눈매가 고혹스러웠다. 화장실 거울로 다른 여자가 손을 씻으면서 의심스런 눈초리로 민수를 슬쩍 훔쳐보았다. 도대체 이 여자 뭐하는 여자야? 술집이라도 나가나? 하는 시선이었지만, 민수는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안 쓰고 가방에서 밴드를 꺼내 치렁치렁한 머리를 하나로 묶었다. 그리고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나 전체적인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민수는 만족스럽게 씩 웃었다. 조금 전 화장실을 들어올 때 요조숙녀처럼 얌전해 보이던 그녀의 모습은 사라지고 완전히 새로운 여자가 거울 속에서 있었다. 자, 이제 가 볼까. 머리를 좌우로 살짝 흔든 민수는 빅백을 어깨에 걸치고 압구정 지하철역 화장실을 나왔다.' 칼바람이 사정없이 불었다. 민수의 입에서는 쉴 새 없이 하얀 입김이 흘러나와 금세 사방으로 흩어졌다. 도로 위의 차들은 어디 불이라도 난 듯, 차 위에 경고등이라도 달아주고 싶을 정도로 쏜살같이 달렸다. 에이! 추워!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민수는 코트 깃을 바싹 여미고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보았다. 그때 빨간색 차 한 대가 그녀 앞에 섰다. 민수는 잽싸게 차에 올라탔다.' “야! 날도 추운데 10분이나 밖에서 기다리게 하니?”' “미안, 미안. 나오는데 전화가 와서 통화 좀 하냐고.”' “무슨 통화?”' “에이전시인데 패션쇼 스케줄 일정 때문에.”' 친구 원희는 말하자면 한때 잘나가는 모델이었다. 이제는 나이도 많고 자꾸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에 밀려 조금 주춤거리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은 그녀의 독특한 분위기와 인지도 때문에 그녀를 선호하는 유명 디자이너들이 적지 않았다. ' “와! 너 신경 좀 썼구나.”' 원희는 운전을 하면서 곁눈으로 민수를 훑어 내리며 말했다.' “당연하지. 근데 이게 뭔 짓인가 싶다. 나도 내일모레면 서른인데 이 지긋한 나이에 탈선한 고삐리처럼 허구한 날 화장실에서 옷 갈아입고 화장하고…… 정말 이 짓 좀 그만하고 싶다.”' “훗! 집에 아빠 계시구나.”' “그래. 정년퇴직하신 후로 집에만 계신다. 꼭 나 감시하려고 집에 계시는 거 같아. 잔소리가 아주 장난이 아니야. 골 흔들려.” ' “그러게. 네 아버지는 좀 심하긴 하셔. 완전 조선시대 양반 같아.”' “내 말이. 숨 막히는 규율에 행동강령. 완전 군대가 따로 없어. 윽, 정말 탈출하고 싶어.”' “그래서 오늘 탈출하잖아.”' 원희의 말대로 오늘은 모처럼 지옥 같은 아빠 그늘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하는 날이다.'민수의 생일이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민수는 아빠 때문에 쌓인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 우선이었다. 스트레스는 제때 풀어 줘야 병이 안 나는 법, 다음 달부터 정신없이 바빠질 것을 생각한 민수는 오늘 제대로 놀아야지 하는 마음뿐이었다. ' “야, 정말 거기가 그렇게 물이 좋아? 나도 유명하다고 듣기는 했는데…….”' “일단 가 봐. 말로는 설명이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