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석양이 아름다운 날이었다.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그것 아래로 어둠이 서서히 몰려들고 있었다. 밤의 마력에 홀리기라도 했는지, 정숙은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옮겨 술집으로 향했다.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그곳은 언제나처럼 왁자지껄했다.'얼마 기다리지 않아, 기다리던 친구 소영이 도착했다. 같은 고등학교에 같은 동네라는 이유로 친해졌던 그녀는 벌써 횟수로 10년을 정숙과 함께 보내고 있었다.'처음에는 간단하게 마시고 끝내려던 술자리가 소영의 푸념이 이어지면서 점점 길어졌다. 일주일 전부터 사귀기로 했던 남자와 문제가 있는 모양이었다. 정숙은 소영의 이야기를 들으며 차가운 맥주를 한 모금 삼켰다. 그녀는 연애 경험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할 때면 거의 듣고 있는 편이었다.'정숙의 얼굴이 그리 못나게 생겼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뛰어나게 예쁜 외모는 아니었지만 묘한 매력이 있었다. 죽도록 아픈 첫 사랑도, 결혼까지 생각했던 남자도 있었다. 그녀의 인생에서 그 두 남자가 전부인 것은 한번 누군가를 좋아하면 오래 가는 성격 탓인지도 몰랐다. 사람을 잃었을 때의 아픔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 아픔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으니까.'술자리는 생각보다 길어지고 있었다. 500cc 잔에 담겨 있는 마지막 맥주를 들이켠 정숙은 손목시계를 살피곤 자리에서 일어났다.'“가게?”'“응. 아빠 오실 때 됐어.”'소영 역시 가방을 챙겼다. 정숙은 소영의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힘내라.”'술집에서 나온 정숙은 다시 한 번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3시가 지나고 있었다. 정숙은 최대한 빨리 걸음을 옮겼다. 새벽 4시쯤 가게 문을 닫는 아버지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그 전에 들어가야 했다. 거의 뛰다시피 움직이던 다리는 집 앞에 도착해서야 멈추었다. 정숙은 하아, 하아, 숨을 가다듬은 후, 대문을 열고 들어가기 위해 가방을 뒤졌다.'“어라, 어디 갔지?”'별로 크지 않은 가방 안을 아무리 뒤져봐도 열쇠를 찾을 수가 없었다. 정숙은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바닥에 가방을 거꾸로 들어 올렸다. 안에 들어있던 파우더, 립글로스, 지갑 등이 쏟아져 나왔지만, 열쇠는 보이지 않았다.'“안 들고 온 건가?”'머리를 핑글핑글 돌리던 정숙은 아침에 가방을 바꿔 메면서 책상 위에 열쇠를 놓고 온 사실을 떠올렸다. 한숨을 쉬며 자신의 머리를 두드리던 그녀는 바닥에 있던 물건들을 다시 가방에 주워 담았다. 잠시 후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피더니,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만족스러운 웃음을 뗬다.'“기특한 것. 아직 그대로 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