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앞 중학교에서 들리는 아이들을 독려하는 마이크 소리가 창문으로 시선을 돌리게 했다. 어느 날부터 그날이 그날 같은 똑같은 나날의 반복 이였던 내 눈에, 학교 앞 교정에 파릇파릇 한 연한 푸른 잎과 반팔 상의에 긴 바지를 입은 아이들의 체육복이 눈에 들어 왔다.'‘아! 체육대회 연습을 하는구나.’ '이맘때쯤에는 어느 학교에서나 치러 질 체육대회 풍경들.'언제 힘찬 남자 선생님의 구령소리가 있었냐는 듯, 조용한 정적이 오더니 나긋나긋한 여선생님의 소리에 남녀 학생의 포크 댄스가 시작 되었다. 음악 소리에 맞혀 춤을 추고, 까르륵 장난을 치는 모습을 보면서 그제야 오월은 신록의 계절이라는 수식어만큼이나 챙겨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은 날들이라는 무게감이 화르륵 덮쳐 왔다.'창가에 서서 내내 바라보고 있던 시선을 돌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해야 할 일들이 하나 둘 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제서야 통화가 된 딸이 상전이라며 걱정 대신 염려를 하시던 엄마의 목소리가 이제야 인식이 되다니 어느새 한숨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삼일 뒤면 어린이 날이라며 이모의 선물을 기다릴 조카며, 딸 걱정에 깊어진 주름의 부모님, 언제 찾아뵈었는지 모를 은사님까지 해야 할 일이 앞 다투어 생각이 나기 시작했다.'오늘이라도 백화점에 가서 선물이며 필요한 것 들을 사야 하는데 생각만 앞서 갈 뿐 어찌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지난 몇 년의 세월이 나에게만은 흐르지 않았던 것처럼, 차디찬 겨울이 지나 여름의 문턱이 가까운 지금에야 아직도 내 계절은 겨울의 초입인 것 같아 두 팔로 몸을 쓸어야 했다. 오소소 찬기가 도는 몸을 추스르려 부엌으로 발길을 돌렸다.'전기 포트에 물을 끓이고, 머그컵에 원두 티백을 넣으며, 환하게 웃어주던 그 사람을 생각했다. 점점 진하게 우러나오는 티백을 흔들며 습관처럼 흐려지는 눈을 비비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그래 생각나면 생각나는 대로 잊혀 지면 지는 대로 그러면서 살아지겠지’'두 손에 머그컵을 받쳐 들고 따듯한 온기를 몸 안으로 조금씩 조금씩 흘려보내며 부엌 창문으로 보이는 물오른 푸른 산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보름 전엔 봄을 알이고 싶어 프리지아 꽃다발을 한 아름 챙겨서 그를 찾아 갔었다.'소소한 일상을 작은 소리로 말해 주던 그와의 만남이, 그날은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듣고 싶지 않아? 궁금하지 않구나. 섭섭하다. 정우 씨.’'제가 말하고 제가 대답을 하면서도 왜 이리도 먹먹한지 처음으로 정우가 섭섭했었다.'밀어내는 것 같은 기분에 왈칵 서러웠었다. '‘나만 나두고 갔으면서…….’'그날따라 그가 있는 공간이 저를 밀어내는 것 같아 당황한 이수는, 며칠째 자신의 휑한 마음을 감당하느라 힘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