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기 들어가지 와! 쯧쯧, 인간아. 니 와 그라고 사는데?”'펑퍼짐한 티셔츠에 추리닝 차림의 건희가 모니터에 얼굴을 박고 킬킬거리는 모습을 보다 못한 화영은 자신도 모르게 혀 차는 소리를 냈다.'“내가 뭘?”'앞머리를 모두 모아 핀으로 단단히 고정해 이마를 홀딱 드러낸 건희가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화영을 두꺼운 뿔테 안경 너머로 힐끔 쳐다보더니 다시 눈을 모니터로 돌렸다. '“니 이라는 거, 느그 부모님은 아시나?”'“너 말고는 아무도 몰라. 그러니까 이 소문 새나가면 넌 죽은 목숨이야, 알았어?”'“하이고, 어디 무서버가 살긋나. 시끄럽고, 저 쓰레기나 좀 내다버리라!”'화영이 코웃음을 치며 현관문 앞에 있는 쓰레기봉투를 가리키는 데도 건희는 끄떡도 않고 열심히 마우스만 움직였다. '“야, 너는 나 바쁜 거 안 보이냐? 이게 말이야, 엄청난 집중력을 요하는 작업이란 말이지. 순간 방심하면 돌쇠를 내 아름다운 리스트에 올릴 수도…….”'“아, 쫌!”'“어, 간다. 야, 나 벌써 일어난 거 안 보이냐? 뭐 더 시킬 거 없어? 없으면 나 갔다 올게.”'화영이 얼굴을 굳히며 ‘쫌!’ 소리를 내는 것은 조금 있으면 폭발한다는 일종의 카운트다운임을 아는 데에 무려 석 달이라는 시간이 소요됐다. 경상도 출신인 화영의 그 ‘쫌!’을 알아듣지 못해 날아간 집안 용품이 얼마인가. 그러니 지금은 화영이 무시무시한 괴력을 발휘하기 전에 알아서 움직이는 것이 집안의 평화를 지키는 일이었다.'견습 작가인 화영은 이번 신춘문예에서도 미역국을 마시고 말았다. 건희가 보기에 화영은 그쪽이 아니라 개그 작가나, 라디오 대본 같은 것을 쓰면 딱일 텐데 본인이 순수 문학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버티고 있으니 더는 권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건희는 안다, 화영에게 개그맨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그것도 상당히 짙은 피가…….'그나저나 이 밤중에 쓰레기를 버리고 오라니 주객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싶었다. 분명 집주인은 자신인데 잠깐만 방심하면 지금처럼 식객 취급을 받기 일쑤다. 강남에 있는 이 13평짜리 독신자용 아파트를 얻기 위해 얼마나 피땀을 흘렸는데 화영 저것은 가끔 날로 먹으려 들 때가 있다.'물론 31살의 독신 여성이 정당한 방법으로 이만한 위치에 아파트를 얻기는 거의 불가능한 일. 건희도 역시 아버지의 보조를 받았다. 하지만 돈 관계에서만큼은 자식, 형제 할 것 없이 일체의 사정을 두지 않는 아버지이시기에 건희도 매달 일정한 이자를 지불하고 있었다. 은행 이자보다는 싸다지만 은행보다 더 가차 없는 조건으로 단 한 달의 이자도 체불되는 것을 용납지 않으시는 아버지 덕에 건희의 달력은 매달 이자 지급 날짜 일주일 전부터 온통 빨간색으로 도배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