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 가을로 접어들었다고는 하나 한낮은 여전히 더위가 물러가지 않은 구월 중순. '서울 강남의,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는 고급 아파트에서 한이 맺힌 듯 절규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열린 베란다 창으로 빠져나와 그 동네 주민들을 소음공해에 시달리게 했다. 하지만 워낙 체면을 중시하고 사는 사람들이니 그저 창을 닫고 에어컨을 켜는 것으로 바깥의 소음과 자신들을 단절시킬 뿐이었다. '“으아악! 너 남극기, 그런다고 내가 눈이나 하나 깜빡할 거 같아? 나 최문선이야, 이거 왜 이러셔. 내가 닭이면 너는 미련 곰이야. 어디다 대고 닭이래, 닭은! 웃겨, 증말!”'제 분에 못 이겨 씨근덕거리던 문선은 냉장고로 다가가 생수병을 들어 병째로 들이켜면서도 들썩이는 어깨를 어쩌지 못하고 기어이 냉동실 문을 열고 꽝꽝 언 얼음을 꺼내 와그작와그작 씹어댔다. '지금 문선이 이리도 광분에 광분을 거듭하고 있는 이번 사건의 발단은 어젯밤이 시작이었다. '귀가 시간이 이른 사람은 아니지만 늦으면 늦는다고 확실하게 보고를 하던 극기였는데 어젯밤은 말도 없이 열두 시를 훌쩍 넘긴 시각에 술 냄새를 폴폴 풍기며 들어왔다. 이제나 오나 저제나 오나 촉각을 곤두세웠던 문선이지만 차마 자존심이 상해 기다렸다는 표도 못 내고 새치름하게 왔냐고 한마디 던지고 방으로 들어갔다. 거기까지만 해도 이번 사태가 이렇게까지 크게 번질 기미는 없었다. 늦었으니 어딜 갔다가 누굴 만나고, 무얼 하다 늦었다 설명을 해야 할 사람이 입에 본드라도 붙인 것처럼 입을 딱 봉하고 있으니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고 문선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자기야, 어디 갔다가 이렇게 늦었어?”'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먼저 흥분하는 사람이 손해라는, 어디서 주워들은 말대로 화를 가라앉히며 애써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다정함이라고는 약에 쓸래도 없는 극기의 퉁명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CEO 모임이 있었어.”'“CEO? 당신이 그 모임에 왜 나가? 당신 CEO랑 무슨 상관있니?”'문선의 말에 극기의 얼굴에는 대략 어이없음과 경악의 표정이 차례로 떠올랐다. 남편 직업이 뭔지도 모르고 묻는데 그럼 이해한다는 표정이 나올까.'“최문선, 내 직업이 뭐지?”'“당신? 사장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