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날이었다. '한창 점자지 위를 누비던 가느다란 손가락에 들린 나무 점필(點筆)이 문득 멈춰 섰다. 점필을 쥐고 있던 손가락이 더듬더듬 손목으로 옮겨와 맹인용 손목시계의 버튼을 눌렀다. 입력된 말끔한 목소리가 읊어주는 시간을 확인하며 상우는 ‘아’하는 짧은 탄성과 함께 이어폰을 벗어 자리를 정리하고 가방을 들었다. 점역(點譯)에 심취한 나머지 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앉아있었던 것이다.'“푸하.”'길게 숨을 내쉬며, 밖으로 나선 상우는 가방을 뒤적여 지팡이를 꺼냈다. 능숙한 솜씨로 접혀있던 지팡이를 원래대로 조립하여 탁! 소리가 나도록 경쾌하게 땅을 딛는 상우의 손길은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상우 씨, 지금 들어가?”'누군가의 반갑게 인사하는 목소리에 상우는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그의 머리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이미 목소리의 주인공을 떠올리고 있었다. 상우는 꾸벅 머리를 숙였다.'“네.”'“또 점역하다가 시간가는 줄 몰랐구나?”'가까워지는 스킨로션의 냄새로 상우는 이 사람이 자신과 같이 복지관에서 점자를 가르치는 김 선생이라는 것을 확신한다. 상우는 가볍게 웃었다.'“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완성이에요.”'“너무 무리하지 마. 어이구, 그래도 상우 씨가 점역까지 해주니 훨씬 좋지만.”'김 선생은 허허 웃었다. 상우는 점자수업을 하는 외에도 종종 책을 읽은 목소리를 듣고 그것을 점자로 엮는 일까지 하고 있었다. 복지관에도 점역하는 봉사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쏟아져 나오는 책들에 비해 점역되는 책의 숫자는 거의 없다고 해도 괜찮을 지경이라 김 선생은 수업과 동시에 점역까지 해주는 상우가 고맙기도 하고 고생하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했다. '“그럼 들어가요.”'“네. 수요일 날 봬요.”'가벼운 인사를 남기며, 상우는 괜찮은 기분으로 천천히 지팡이를 짚으며 계단을 내려왔다. 가벼운 바람이 불어 상우의 흐릿한 동공을 자극했다. 잠시 눈을 깜빡이며 상우는 점차 어스름이 깔리는 정경에 적응해 나갔다. 정말 시간가는 줄 몰랐던 것 같다. 밖에 나선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어스름이 깔리는 것을 보면. 그러자 문득 아쉬움이 들었다. 조금만 더 빨리 나설 것을. 그랬다면 빛만을 감지하는 내 눈동자가 조금 더 오랫동안 밝음을 느낄 수 있었을 텐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