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제주의 앞바다가 보이는 완만한 기울기에 평원과도 같은 오름.'새로 산담을 세우고 잔디가 채 뿌리도 내리지 않은 봉분 앞에 검은 상복을 입은 소년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몇 살이나 되었을까? 열한 살? 열두 살? 검은 상복을 입어서 키가 더 껑충해 보이고 의젓해 보이기까지 한 소년은 이제 겨우 아홉 살이다. 곧 개학을 하게 되면 초등학교 2학년에 올라가는 소년. 지금 지키고 있는 묘지의 주인이 세상과 이별을 고하고 야속하게 떠나가면서 소년에게 고아란 이름을 남겨버렸다.'산담 밖에는 서른 중반에 드는 두 남자가 서서 소년과 무덤을 허망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둘 다 넋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생기라곤 눈곱만큼도 비치지 않았다.'목석같이 서 있던 소년이 말라붙었던 입술을 달싹였다.'“엄마…….”'눈물은 흘리지 않았다.'“아파하는 모습이 너무 싫어서 빨리 퇴원하기를 바랐는데,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기도하지 말 걸…… 미안해, 엄마…….”'하지만 이전까지 얼마나 울었는지 두 눈은 붉게 충혈이 되고 눈덩이와 양 볼은 퉁퉁 부어 있었다. 소년은 잔뜩 쉬어서 쇳소리로 말을 이어갔다.'“엄마…… 나 엄마한테 반항할 거야. 엄마 말 듣지 않을 거야…….”'거기까지 말한 소년은 퉁퉁 부어서 잘 움직여지지 않는 한쪽 볼을 씰룩거리며 웃음을 지었다. 조금은 악동 같은 모습이다.'“나 서울 따윈 가지 않을 거야. 내가 태어난 목장에서 엄마가 남겨준 말들을 보살피며 아주방들이랑 살 거야.”'그 순간 산담 밖에 서 있던 남자들이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삭막했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어깨는 무엇 때문인지 격정으로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소년이 다시 고저 없는 목소리로 무덤의 주인과 대화를 이어갔다.'“엄마보다 못생긴 아줌마한테 엄마라고 부르기도 싫고, 그 점잖은 척하면서 뒤로 호박씨나 까는 아저씨도 싫어. 그리고 그 아저씨 딸들도 무지하게 싫어. 그래서 정말 말썽을 많이 부릴 것 같거든. 그러면 나 틀림없이 구박 많이 받겠지? 엄마가 여기서 날 더 걱정하게 될지도 몰라. 이번 일은 날 걱정할 엄마를 위해서 내린 결정이야. 이건 날 두고 떠난 엄마가 무조건 이해해야 하는 거야. 알아들었지, 엄마?”'소년은 담담한 표정으로 무덤의 주인을 설득하였다.'“또 엄마가 그 아저씨에게 빼앗겼던 다른 목장도 되찾고 말겠어. 그래도 되지, 엄마? 내 맘을 이해 못하겠다면 엄마 버릇대로 ‘이 뿔난 망아지야, 말 좀 들어!’라고 말해.”'소년은 그렇게 말하고는 대답을 기다리는 것처럼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 묘지를 내려다보았다. 봄볕 햇살이 소년을 따사롭게 내리쬐었다.'“대답이 없는 것을 보니까 엄마도 내가 목장을 떠나는 게 싫었던 모양이구나? 그럼 엄마도 허락했으니까 난 목장에서 계속 살게. 엄마, 나…… 씩씩하게 살게. 엄만 내가 씩씩한 게 팔팔한 망아지 같아서 좋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나 계속 씩씩하게 살면서 엄마의 착한 아들이 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