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마를 사랑하지 않았다. 단 한 순간도.'사랑한다고 처절하게 절규했지만, 그건 그냥 말장난에 불과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의 양심은 알았다. 제마의 비서실을 나와 7층 복도를 걷는 유리의 표정은 태연자약했다. 마스카라가 번져 있지 않았다면, 오 분 전 저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그녀조차도 모를 정도로 말이다.'“아이, 더 번지네. 쯧!”'여자 화장실에 들어가 번진 마스카라를 손보다가 짜증이었다. 쉽게 수정되지 않았던 것이다.'“앞으로는 눈물을 흘려도 번지지 않는 것으로 발라야겠어.”'거울을 보며 눈을 까뒤집고는 중얼거렸다. 면봉으로 훑어 내리고 대충 정리하니 그나마 나아졌다. 손을 씻고 거울을 보는데 입술이 일그러졌다. 자존심 따위는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호화롭게 살고 싶었다.'그녀가 바란 것은 행복한 삶이 아니었다. 누가 봐도 부러워할 만한 그런 휘황찬란한 삶 말이다. 서러운 유년을 보냈다. 굶기를 밥 먹듯 하다가 황말순을 만났다. 곁다리에 또 다시 걸친 곁다리의 친척이라고도 할 것 없는 사람이었는데, 아버지가 그녀를 찾은 것이다. 생전 아버지는 누구에게 뭔가 부탁할 위인은 아니었다. 땟거리만 있었다면 절대 촌수조차 기억나지 않는 황말순을 찾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그녀를 찾았고, 그녀에게 구걸한 것이 시작이었다. 말순의 도움으로 아버지가 일군 작은 사업은 번창했다. 그러나 끼니를 굶지만 않았다 뿐이지 경기에 따라 휘청휘청하는 위태위태한 그저 그런 삶이었다.'처음 말순의 집에 놀러 왔을 때, 삶의 모습이 이렇게 달라 질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녀 나이 고작 여섯에 말이다. 자신이 살고 싶은 황금빛 삶이 말순의 집에 있었다. 잘만 하면 그것이 모두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 올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그때는 그녀 나이 여덟 살이었다.'그날은 제희의 생일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음식들이 있었고, 희귀한 과일들도 있었다. 그녀가 그 자리에 초대받는 것은 우연이었다. 안부인사차 들렀는데, 파티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두 팔 벌려 반긴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유리도 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제 나이의 아이들답게 한참 소란을 떨며 노는데, 한 아이가 소리 없이 나타났다. '유리는 제 눈을 의심했다. 세상 천지에 저렇게 아름다운 사내아이도 있을까. 짙은 눈썹 아래 나이에 걸맞지 않은 사색이 깊고 그윽한 눈동자, 쭉 뻗은 콧날과 조금 도톰하다 싶은 여자아이보다 더 예쁜 붉고 탐스러운 입술. 가슴이 철렁 떨어졌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너무나도 신비롭게 느껴지는 아이였다. 유리는 그의 등 뒤를 살펴보고 싶었다. 혹시 부러진 날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더욱 놀란 것은 그 다음이었다.'“너,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