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야한 입술, 아찔함

겨울의 끝을 재촉하는 빗속으로 연두 빛의 우산을 받쳐 든 가인이 걸음을 서둘렀다. 몸을 움츠리게 하는 비바람 속에, 우산 손잡이를 잡은 가느다란 손은 뻘겋게 얼어붙었다. 무거워 보이는 검은 뿔테 안경 밑의 표정 없는 눈빛은 젖어드는 캔버스화에 놓여 있었다.' 학과 사무실로 향하던 발길은 건물 앞에 거의 도착해서야 느린 행보로 바뀌었다. 거센 빗물에 젖어 흔들리는 우산 끝 부리를 치켜 올리자, 생각을 쉽게 읽어내기 힘든 얼굴이 드러났다.' 가인은 차가운 우산대를 귀밑 어깨위에 걸치고, 짙고 숱이 많은 속눈썹 사이로 앙상한 담쟁이 넝쿨이 늘어선 적색 벽돌의 건물을 바라보았다.' 그때, 시선을 사로잡는 말쑥한 옷차림을 한 사내가 긴 다리를 빠르게 움직여 처마 밑으로 뛰어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남자는 미처 우산을 준비하지 못했던지 굵은 빗방울을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겨울비에 젖어들었다.' 성큼성큼 앞 다투어 놓아가던 발길에 흙탕물이 튀고, 그의 바지자락은 물빛에 물들었다. 비를 맞지 않는 곳에 몸을 들인 그는 건물을 등지고 빗물로 흥건히 젖은 머리카락을 큼지막한 손으로 털어내기 시작했다. ' 축축해진 부드러운 갈색 머리칼 밑에 날카로운 눈빛이 가인의 발길을 붙잡고 얼어붙게 만들었다. 창백한 얼굴에 또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사내의 얼굴은 등을 오싹하게 만드는 차가움으로 채워져 있었다.' 붉은 입술은 움직임 없이 닫아져 있었고, 색기를 품은 듯한 오묘한 입술엔 그녀의 온몸을 마비시키는 아찔함이 숨어 있었다.' ‘남자 입술이…… 너무…… 야하다…….’' 이제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소름 끼치는 아름다움을 경험하게 되었다. 머리칼을 털어내는 빠른 손놀림 밑에는 섬뜩하고 매서운 눈매가 번뜩였다. 감정 없는 차가운 눈빛이 가슴을 파고 들었다.' 귀가 먹먹해질 만큼 우산을 뒤덮는 빗속에 가인은 우뚝 선 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무관심했던 가슴속으로 한 남자의 모습이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커다란 안경 밑의 얼굴을 굳힌 채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 가인과, 재수 없게 느닷없이 쏟아진 겨울비에 흠뻑 젖어 속이 뒤틀리고 있던 수황의 눈빛이 중간점에서 맞닿았다. ' 가인의 가슴은 티끌만큼도 경험해 보지 못한 설렘과 두근거림으로 혼란스러움을 맛보았고, 한 점의 흐트러짐 없이 양 갈래로 곱게 땋아 내린, 시대에 뒤떨어지는 형상의 여자를 보는 수황의 얼굴엔 비소가 머물다 갔다.' 짧은 순간에도 그의 눈빛은 그녀의 모든 의식을 빼앗아갔다. 세상의 움직임이 정지한 듯했다. '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빗속에 서 있는 촌스럽고 못생긴 여자의 모습을 비웃는 듯하던 남자는 서서히 몸을 돌려 건물 안으로 사라져 갔다. '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하던 거만한 몸짓이 사라졌음에도 비어진 그의 자리에서 시선을 거둬 오지 못했다. 머릿속에선 여전히 아찔한 남자의 모습이 그곳에, 서 있는 듯했다. ' ‘유가인, 아니야. 사치스런 겉모습과 오만함이 온몸을 두르고 있는 저런 남자는 안 돼.’' 한참을 한 곳에 붙박여 있던 그녀는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맥이 풀린 손목에 힘을 주고, 차갑게 굳어진 다리를 움찔거리며 조심스럽게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미리보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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