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절로 들고 있던 잔에 힘이 들어간다. 에스프레소 잔을 ‘캉’ 하는 소리가 나도록 잔받침위에 내려 놓았다. '저렇게 눈웃음을 치며 나이 든 남자 옆에 찰싹 하고 붙어 있는 모습이라니.'큰 누나 말이 맞았던 것이다. 그녀의 말 같은 것 사실 반신반의했는데 말이지. 저 나이든 남자 외에도 추근추근 대는 남자들에게 어찌나 생글생글 웃으며 눈웃음도 잘 치던지.'돈 좀 있어 보이고 나이 많은 남자라면 좋다 이건가? '맞아. 저 여자 지금은 제이미 리브의 여자라고 했잖아. 그렇다면 저건 양다리? 아니 저기 보이는 것 말고 남자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 맙소사! 이제 갓 20살을 넘은 여자로서는 참 하기 힘든 대담함이군!'혀를 끌끌 차며 태욱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 주었다. '손가락으로 턱을 기댄 채 한참 동안 무언가 생각을 하던 태욱은 갑자기 궁금해졌다.'저 여자 나를 바라보게 하고 싶다. '한 번 정도. 혹은 그 이상이면 더욱 좋아. '자신과 부딪친 저 귀여운 눈동자가 어떻게 변할까?'자신을 향해 어떻게 웃을지 한 번 해 보고 싶어졌다.'두툼하고 모양 좋은 입술 끝이 살짝, 그리고 못되게 삐뚜름히 걸리는가 싶더니 그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서며 들고 있던 이코노믹 주간지로 살짝 에스프레소 잔을 쳤고, 그 자연스러운 리액션에 맞아 떨어진 잔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지며 쨍한 소리를 냈다.'토마스 아저씨 옆에 앉아 있던 지오가 예상대로 그 소리에 반응하여 고개를 돌렸다. '난처한 듯 깨진 잔을 바라보고 있는 태욱의 모습이 들어오자, 그녀는 직원의 반사본능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에게 다가왔다. '“손님, 괜찮으세요?”'“이런. 네. 전 괜찮습니다.”'투덜거리며 냅킨으로 바지를 문지르는 태욱. 잿빛의 말끔한 비즈니스 슈트에 잔뜩 커피 얼룩이 져 버리고 말았다. 가까이 있던 매니저도 시끄러운 소리에 달려와 그의 상태를 살피며 안부를 물었다. 그 와중에 지오는 다시 주방으로 달려가 재빨리 물수건을 가져와 그에게 내밀었다.'“안 다치셨어요? 이거. 갓 나온 거라 많이 뜨거웠을 텐데.”'지오는 함께 들고나온 빗자루로 빈 쟁반에 깨진 찻잔 조각들을 주어 담기 시작했다.'“네, 괜찮습니다. 아뇨. 다치지 않았어요.”'“다행이네요. 앗! 손님, 조각은 만지지 마세요. 제가 줍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지오는 조각을 주우려는 커다랗고 매끈하면서도 단단해 보이는 손을 잡아 말리며 태욱을 바라보았다. '갈색의 동그란, 반짝반짝 빛나는 지오의 눈동자가 아주 가깝게 시선에 들어왔다. '햇빛이 통과한 눈동자가 갈색 보색처럼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가까이서 본 그녀의 눈동자는 그를 빨아들일 듯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눈이 참 예쁘구나. 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만드는 순진하고 맑은 눈동자가 아무 의심도 없이 태욱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런 예쁘고 착한 눈동자를 가진 사람이 어떻게?'눈동자가 맑게 빛나며 자신을 바라볼수록 그는 더욱 화가 치밀었다.'“이런. 커피를 다시 한 잔 시켜야겠네요. 몇 모금 마시지도 않았는데.”'여자들을 미치게 하는 상큼 달콤한 미소를 얼굴 가득 깔며 그가 보드랍고 말랑한 음성으로 지오에게 말했다.'“그렇게 하시겠어요? 바로 다시 드리겠습니다.”'태욱이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지오를 향해 빙긋 웃었다.'살짝 붉어지는 지오의 얼굴. 잘생겼다 모든 이목구비가 반듯하게 얼굴위에 위치도 참 잘 잡았구나. 부드럽고 날카로움을 함께 겸비한 얼굴도 참 잘났지만 정중하게 입가에 걸린 실키한 미소가 참으로 세련된 남자였다.'아빠와는 정반대의 타입. 아빠가 가만히 있을 때면 오히려 더 부드러워 보이고 입을 열면 본래 성격이 나오는 타입이라면 이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면 진가를 발휘하는 타입인가 보다.'한편 의젓하게 일하는 지오의 모습이 사랑스럽다는 듯 내내 지켜보는 지오 등뒤의 토마스 아저씨의 눈길을 태욱은 한 점도 놓치지 않았다. '너무도 다정하게 홀린 듯이 지오의 움직임을 쫓는 그의 시선을 보고 태욱은 두 사람이 보통 사이는 아닐 거라고 자기 마음대로 짐작하고 결론까지 내려 버렸다.'“건방진 꼬마아가씨로군. 아직 호적에 잉크도 말랐을 거 같지 않은 나이인데…….”'양손에 쥔 떡을 놓고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조절을 한다 이건가? '저런 늙다리를 상대로 해서 이 여자를 뺏어야 한다고? '나를 뭘로 보고? '마음속에 젊은 남자 특유의 경쟁심이랄까 의지랄까 그런것들이 불끈 솟아 올랐다.'제나 신? 이제 완전히 한물갔구만. 저런 어린애한테 자기 남자 뺏기고 징징거리다니. '하긴 아까 반대편 테이블에 앉아 있던 아저씨와 있는 모습을 봐서는 생긴 것과는 달리 보통내기가 아닌 것 같았다. '다시 에스프레소를 가져온 지오를 지긋이 바라보는 태욱의 시선을 느낀 듯 지오의 하얀 뺨이 숨김새도 없이 살며시 붉어졌다.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는구나. 이 고약한 새끼 고양이 같으니. '내게 걸렸으니 당신, 아주 혼줄이 날 거라고. 저런 늙은이한테 너정도 아가씨 뺏어오는 건 시간문제랄까.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아, 죄송합니다. 그게 아니라 우리 전에 어디서 만난 적이 있지 않던가요?”'고전적이다 못해 지루한 아이템. 설마 이 노련한 여자에게 성공할까? 라고 생각했다.'그러나 때때로 클래식한 아이템이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성공률은 높은 법이다.'“그럴 리가요.”'고개를 가로 저으며 강하게 부정을 하는 지오. '이런 남자를 만났더라면, 그냥 우연히 단 한 번이라도 만났더라면 그녀는 절대로 잊을 수 없었을 거다. 이렇게 키가 큰 남자도 아빠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러나 늘 산처럼 든든한 느낌이었던 아빠와 달리 이 남자는 왠지 묘하게 알 수 없는 위험스런 향기를 내뿜고 있었지만 말이다. '아직 미숙한 지오의 여성적으로서의 감각조차 ‘물러서.’ 라고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속의 그런 경고를 무시해 버린 지오는 왠지 그가 풍기는 그 남자의 느낌이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울리는 그런 경고음에 대한 반항심과 함께 호기심만 더욱 솟아 올라왔다.'이런 남자와 연애를 하게 된다면 어떠 느낌일까? 마음 한구석이 상상만으로 콩콩 뛰기 시작했다. '“흐음. 나 어디선가 분명히 아가씨를 만났던 것 같은데.”'생긋 그의 눈끝에 웃음이 잔뜩 묻어나며 지오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린 여자의 심장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아니요. 그럴 리가 없어요. 손님. 좋은 시간 되세요.”'이런 타입의 남자를 만났다면, 기억하지 못할 수가 없겠지. 게다가 지오는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미국에 있지 않았던가! 이런 남자를 어떻게 만날 수 있단 말인가.'남자가 에스프레소를 다 마시고 카페를 나갈 때까지 지오는 힐끔힐끔 그를 몰래 관찰하며 부지런히 그의 모습을 눈동자로 쫓고 있었다.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인상, 섹시하면서도 느끼하지 않은 그런 타입의 남자. '왠지 사랑하진 못해도 이런 두근거림 쯤은 당연하게 느껴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 남자가 카페를 떠난 후, 지오는 빈자리를 정리하기 위해 남자가 앉았던 자리로 다가갔다. 빈 잔과 테이블을 정리하고 돌아서는데 문득 시선이 그가 앉았던 자리에 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