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인드가 내려진 사무실, 무표정한 얼굴의 남자는 벌써 몇 시간째 같은 자세로 미동도 없이 앉아 서류철을 검토하는 중이었다. 그는 시계바늘이 이미 점심시간을 지나쳐 가리키고 있다는 것도, 비서들의 신경이 온통 그가 있는 <대표이사실>을 향하고 있다는 것도 전혀 알지 못했다. 그에겐 그 고요함 아니 적막함이 익숙했다. 반복되어 온 일상이었다. '그렇기에 그것을 깨뜨리는 잡음 따위는 낯설었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지금 문 밖에서 들려오는 이질적인 음성과 같은.'서류를 들여다보던 그는 서서히 고개를 들어 아직은 닫힌 문을 향했다. 그의 예상대로 곧 더욱 확대된 소음에 이어 문이 예의 없게 벌컥 열렸다. 눈살을 찌푸린 채 자신만의 공간에 멋대로 발을 들여놓은 침입자를 노려보던 그는 왠지 눈에 익은 여인의 실루엣에 펼쳐들고 있던 서류를 스르륵 내려놓고 말았다.'설마 하는 그의 의구심에 확신을 끼얹듯 4년 전과 변함없는 목소리가 사무실 안을 울렸다. '“잘 지냈어요?”'그의 빈주먹에 힘이 주어졌다. 자제력을 잃지 않으려 어금니를 깨물며 그는 여자 뒤에서 어쩔 줄 모르고 선 비서에게 나가라는 눈짓을 해보였다. 그 즉시 문이 닫히고 그의 공간은 다시금 옅은 어둠에 잠겨들었다. '문간에 선 여인과 책상 뒤에 앉은 그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는 좀 전과 달리 불안한 듯 두 손을 비틀고 선 여자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그녀를 저 불안함에서 건져줄 의향은 조금도 없었다. 다시 보고 싶지도, 다시 볼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던 저 여자가 왜 갑자기 그의 사무실에 나타난 것인지 궁금증이 일었지만 묻지 않을 심산이었다. '철저히 무시해주리라. 그녀가 철저히 그를 버리고, 그의 마음을 짓밟았던 것처럼. '“당신 한 번 만나기 참 어렵네요. 내가 유진후 씨 전처라고 그래도 다들 믿질 않는 거 있죠. 훗.”'그렇게 말을 하며 뭐가 그리 재미난 것인지 그녀는 웃었다. 그런 그녀는 그가 기억하고 있는 신단영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다 진후는 깨달았다. 단영이 원래 밝은 성격이었다는 사실을. 그와의 결혼생활 동안 그녀가 점차 웃음을 잃어갔던 통에 그것을 잊고 있었다.'새삼 과거의 기억이 떠올라 그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진후는 그런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난 음성으로 웃음 띤 단영을 향해 물었다. '“여긴 무슨 일이지?”'“그냥 당신 얼굴 보러 왔다고 하면…… 안 믿을 거죠?”'당연히 믿지 않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