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더웠다. '9월이면 초가을이 아닌가, 하고 의아해질 수밖에 없지만 땀이 비죽거리며 새어 나오는 것을 보면 여름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17살의 어린 소년은 연신 손부채질을 해대며 용인에 있는 모 놀이공원에 가을 소풍이라고 온 것 자체가 소년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나마 괜찮은 것은 사복이라는 것 정도다. '‘아마 넌 자유이용권 안 끊을 걸 후회할 거다.’'경모의 두툼한 목소리가 소년, 선우의 귓가에서 울렸다. 남들 모두 자유이용권을 신청할 때 혼자서 입장권을 써 냈던 것을 선우는 열광적으로 후회하고 있었다. 이 무더위마저 날려 버릴 만큼 오싹한 놀이기구를 타고 있는 친구들을 올려다보며 혀를 조금 내밀었다. 솔직히 용돈은 제법 두둑하게 받아왔으니 한두 개쯤은 돈을 내고 탈 수 있었지만 ‘거봐, 내말이 맞지?’라며 자신을 비웃을 경모를 생각하니 애써 참아내고 있다. '시간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르게 정신없이 친구들에게 끌려 다니며 그들이 놀이기구를 타는 것을 구경해야 했던 선우는 마침내 짜증이 머리끝까지 올라와 이를 으드득 거렸다. 보기도 아찔한 놀이기구를 기다리는 친구들의 뒤로 하고 차가운 오렌지 맛 슬러시를 손에 쥐고 챙이 넓은 파라솔 밑에서 심드렁하니 앉아 있었다. 나무 벤치 위에 알록달록한 파라솔이라니, 이것저것 다 짜증으로 뒤섞인다. '“쪽.”'파란 빨대의 끝에 입을 대고 차가운 슬러시를 길게 빤 선우는 드디어 놀이기구를 타러 보이지 않는 곳으로 쏙 들어가 버린 경모와 친구들을 향해 가볍게 코웃음을 쳐주고 중얼거렸다.''“나아쁘은노옴드을.”'늘어지게 한 마디 해 주고 괜스레 우울해져 벤치에 두 다리를 올린 선우는 녹아가는 슬러시를 멍하니 들고 다시금 손부채질을 하는 순간 엉덩이 쪽으로 약간의 진동이 찾아왔다. 꽤나 큰 진동에 옆을 본 선우는 크게 놀라며 몸을 틀었다.'“…….”'머리가 반쯤 돌아가고 빳빳했을 것 같은 갈색 털이 축 처진 상태로 제멋대로 뻗쳐 있었다. 해맑은 별을 담은 듯한 눈동자는 검은 동공을 보이며 반짝 거리고 있었지만…… 어딘가에 긁혔는지 스크래치가 하얗게 보인다. 레이스가 달린 치마에 나름대로 구두까지 신은 ‘여자 곰’은 선우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지 점점 축 처지더니 어느 순간 허리를 펴고 벤치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사람의 마음이란 참.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놀이기구를 타지 못한 채 혼자 벤치에 앉은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고 있었지만 지금은 곰 탈을 쓰고 이 더위에 삶 다 산 것처럼 늘어진 사람보다는 훨씬 나은 형편이라고 자위했다. 게다가 자신은 손에 차가운 슬러시까지 쥐고 있지 않은가. 나름대로 낯을 가리는 선우지만 지금은 차마 그냥 있을 수 없었고 소년은 조심스럽게 절반쯤 녹은 슬러시를 내밀었다.'“저기…… 형, 드실래요?”'무거운 탈을 쓰고 쩍 벌린 다리를 보아 남자임을 확신하곤 다정스레 그것을 건네주자 삶의 애환을 담은 곰이 반색하며 슬러시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고맙다는 듯 고개를 까딱거리고 빨대를 조금 벌려진 귀여운 입에 쏙 넣었다.'“우와.”'한참 인기 있던 CF 중에 눈으로 마시는 맥주라면서 그냥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맥주가 줄어드는 광고가 있었다. 정말 그것처럼 슬러시는 쉼도 없이 쭉쭉 줄어만 갔고 멍청하니 그것만 바라보던 선우는 다 먹고 나서 남은 방울까지 빨아먹는 곰을 보며 약간의 괘씸함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론 웃음이 나와 입을 살짝 가리고 키득거렸다. '“후아!”'투명한 컵만 남은 슬러시를 내려놓으며 탄성을 내뱉는 목소리에 선우는 약간 의아함을 느꼈다. 온몸으로 풍기는 사내의 포스가 무색할 만큼 예쁜 목소리가 터져 나온 것이다. 빤히 바라보는 선우의 눈길을 느꼈는지 행복함에 스크래치 난 눈동자가 한층 더 반짝이는 것 같았던 곰은 이내 손으로 머리를 열더니(!) 함박웃음을 지었다.'천둥이 치고 하늘이 무너지고 그 속에서 데굴데굴 바윗덩어리가 떨어져 어린 소년의 머리를 마구잡이로 때리는 것 같았다. 발끝에서 시작된 뜨거운 무언가가 왼쪽 가슴에 머물곤 미친 듯이 두근두근 거렸다. 하나로 질끈 묶은 검은 머리카락과 땀에 젖어 약간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까지도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검은 눈이 활처럼 휘어 바라보고 약간 붉은 입술 안에 고른 하얀 치열까지도 눈 속 가득히 담겼다. '“고마워요! 아, 정말 죽는 줄 알았다니까, 휴.”'사실 보자면 평범한 얼굴이었다. 약간 연약해 보이고 귀염성 있는 얼굴이지만 따지고 보면 한껏 곱상한 얼굴의 선우가 더 예쁘장하지만, 그건 제쳐두자.'여하튼 혀를 작게 내밀고 선우를 향해 웃은 그녀는 선홍빛의 볼을 보이며 다시 곰 탈을 썼다. 그리고 좀 더 활발해진 몸동작으로 선우를 향해 귀엽게 손을 흔들곤 다른 곳으로 갔다. 아니, 가려했다.'“잠깐만요.”'앞서 말했듯이 낯을 가리는데다가 소심하기까지 한 선우가 곰의 두꺼운 팔을 잡았고 의아한 듯 몸을 멈춘 곰과 잠시 눈을 마주쳤다. 입술만 달싹거리며 한참을 그렇게 있던 선우는 곰의 팔을 잡은 손을 놓지 않고 나머지 손으로 주머니를 뒤졌다. 그리고 얼른 휴대폰을 꺼내어 건네며 말했다.'“스……슬러시 값…… 어, 그니까 그거…….”'“정선우, 뭐하냐.”'놀이기구를 타고 내려온 친구들이 곰과 대치한(?) 선우를 향해 다가왔다. 그러나 선우는 아무런 대꾸도 안 하며 곰에게 휴대폰을 내민 채 온통 얼굴은 빨갛게 물든 상태로 서 있었고 그 알싸한 분위기를 알아챈 경모가 휘파람을 불었다.'“……네, 네.”'아마 가려진 곰 탈 안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어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선우는 휴대폰을 쥐어주고 기다렸다. 하지만 곰의 손가락은 휴대폰 버튼을 가리기에 충분했고 당황한 곰은 휴대폰을 선우에게 주며 말했다.'“저…… 말씀드릴 테니까…….”'파르르 떨리는 목소리가 부끄러워하는 것이 틀림없다. '선우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고 휴대폰을 들고 귀를 기울였다. 작은 목소리가 울리며 번호가 하나하나 선우의 휴대폰에 찍혀 갔다. 살짝 떨어져서 여전히 야유와 휘파람을 불어대는 친구들의 소리를 전혀 들리지 않는다. '“…….”'“이야, 정선우! 이 얌전한 고양이 자식!”'경모의 거친 손이 선우의 머리를 헝클었다. 얼른 달려가던 치마 입은 곰은 얼마 못 가 어린 아이에게 잡혀 사진을 찍고 있었다. 불타는 숯덩이가 된 얼굴을 가리며 휴대폰을 꼭 쥔 선우는 침을 꼴깍 삼켰다. '정선우 17세. 인생 최초의 헌팅은 그렇게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