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흘리개 시절,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시골에 잠시 산 적이 있었다. 어머니께서 일을 나가신 후면 난 변변한 놀이친구 하나 없이 홀로 밭에 나가 싱싱하게 매달린 가지를 그 자리에서 따먹고는 했다. 그 당시 생으로 먹던 가지 맛은 지금도 쉽게 잊히지 않았다. '근처에 목장이 있어서 처음으로 진짜 소젖을 끓인 우유를 마셔 보았다. 동생은 가공한 우유가 아니라서 비리다며 먹지 않았지만 난 연한 수프 맛이 나는 생소한 우유를 맛나게 마셨더랬다. 하긴, 찢어지게 가난한 그 시절에 그 무엇이 맛없었을까.'내게 있어 향수(鄕愁)란 무엇일까. 가난하고 힘들었던 유년시절을 지내고 고등학교를 입학하면서부터 결코 잊히지 않았던 행복한 기억은 생각만 해도 신록의 바람이 떠오를 만큼 아름다웠던 그의 모습이었다. 내가 유일하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해 준 사람. 3년 내내 고달픈 학창 시절을 견딜 수 있도록 힘을 준 사람. 하지만 그는 나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고3때, 딱 한 번 같은 반이 되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사람 이름뿐 아니라 얼굴도 잘 기억하지 못했다. 그것은 어찌 보면 거의 병적이라고 할 만큼 지독했으며 한편으로는 무의식적으로 각인된 습관처럼 보이기도 했다. 비록 그가 내 이름 한 자 모르고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할 지라도 난 좋았다. 멀리서만 바라보다가 조금 더 가까운 거리에서 그를 몰래 훔쳐볼 수 있었으니까. '그때가 내 생애 통틀어 가장 많은 그림을 그렸었던 때였고, 열정이 풍부했던 시기였다. 하지만 잡고 싶을 만큼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은 그에게서 나를 멀리 떨어뜨려 놓았고 부산스럽고 조금은 슬펐던 졸업식이 끝나자 그는 미련 한 점 없다는 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학교를 떠났다. '기다란 그의 그림자가 점이 되어 사라지고도 한참동안이나 운동장에 우두커니 서 있었던 나는 차가운 바람에 붉어진 뺨을 쓰다듬다가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후로 난 다시는 붓도, 연필도 잡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