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웠던 낮의 열기가 사라질 저녁 무렵 엄청난 양의 비가 퍼 붓기 시작했다. 일기예보에서 말한 대로 태풍이 서울까지 상륙한 것 같았다. 비 내리는 소리를 듣던 그녀는 자신의 가슴 깊은 곳에서도 비가 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시원스럽게 내리는 그것이 자신의 마음을 씻어줄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창문을 활짝 열었다. 하지만 그 비도 아픔을 씻어줄 수는 없었다.'미정은 폭포수처럼 내리고 있는 비를 무표정하게 바라보다 갑자기 생각난 듯 가방을 뒤졌다. 그녀는 며칠 전에 시작해 어제 완성한 보랏빛 하트가 새겨져 있는 열쇠고리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손가락에 반지인 양 끼워 한참동안 빙그르르 돌렸다. 보라색은 형광등 불빛을 받아 미묘한 색으로 반사되었다. 그 빛에 미정은 한참동안 빠져들었다. '잠시 후, 그녀는 옷장 위에 있는 작은 여행용 가방을 꺼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서 먼지가 앉아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가방을 열어 손에 잡히는 대로 옷과 소지품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기다렸다. '시간이 천천히 흘렀지만 그런 것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시간이 자정을 넘기자 숨을 죽이고 울던 어머니도 한숨 소리만 내시던 아버지도 잠자리에 드신 것 같았다. 집안 식구들이 모두 잠이 든 것을 확인할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후 그녀는 조용히 집을 나왔다.'미정은 현준의 얼굴을 떠올리며 비가 쏟아지는 어두운 밤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비가 살갗을 찌르듯 내리고 있었지만 그 아픔보다 더한 슬픔으로 의식하지 못했다. '''현준은 강씨 아저씨가 다쳤다는 말을 듣고 병원에 갔다가 저녁 늦게야 집으로 돌아왔다. 내일이면 병원에서 나올 텐데 뭐 하러 밤새 고생을 하냐며 등을 떠미는 바람에 집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곧 장마가 시작 되려는 지 오늘 하루 종일 햇볕이 뜨거웠다. 차가운 물로 대충 씻은 다음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쪽마루에 앉아 땀을 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