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허스키 블루

◆프롤로그
''''''“나가 열 살 되던 해 봄에 보릿고개가 참말로 심혔어. 닥치는 대로 나무껍딱도 벗겨 먹고, 왼갖 풀뿌리들은 죄 뜯어다 먹었응께. 그라도 이집 저집서 죽어나자빠지는 사람들이 숱혀부렸제. 하루는 울 아부지가 낼 부르는 거셔. 아랫마을로 시집을 가라드만. 그 어린 게 뭘 알았겄어? 그저 하얀 쌀밥을 배불리 먹을 수 있다닝께 껌뻑 넘어가서는 보따리를 싸부렸제.”'얼굴도, 손등도 온통 쭈글쭈글한 주름살투성이 노파가 길게 담배연기를 뿜었다. 볕에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 위로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점차 뿌옇게 흐려지는 대형 화면 저쪽 끝에서 삼십 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시집오신 뒤로 끼니 걱정은 안 하셨겠네요?”'“웬걸…… 말도 말아부러. 똥구멍 찢어지게 가난한 건 울집이나 시댁이나 매일반였당께. 그나마 코딱지만 한 논마지기라도 있었응께 겨우 입에 풀칠은 혔제. 하루 죙일 허리가 꼬꾸라지도록 죽살라케 일하고 나믄 저녁밥이라고 요맨큼 주는 거셔. 하긴 그때는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팠응께. 밥을 하믄 울 시어마이가 꼭 나 밥부터 퍼 줘. 위에 얹어놓은 시래기며 시꺼먼 보리는 거둬서 미느리 먼저 주고, 당신 아들하고 딸들은 쌀밥을 먹이고 잡었든가 봐.”'“많이 속상했겠어요?”'“어린 맘에 쪼까 짠혔제. 그라도 어쩌겄어. 말이 좋아 민미느리제, 나가 어디 미느린가. 품삯 안 들어가는 일꾼일 뿐였제.”'세월의 골이 깊게 패인 주름진 눈자위로 말간 습기가 스며들었다. 카메라가 빨갛게 충혈된 노파의 눈동자를 클로즈업했다. 모진 세월을 거슬러 더듬는 처연한 눈동자 속에 결코 세상을 향한 원망 따위는 없었다. 다만 보는 이들로 하여금 절로 콧날을 울리게 만드는 애달픔이 담겨져 있을 뿐. 지독한 가난에 겨워 열 살 어린 나이에 팔려오듯 민며느리로 들어와 평생을 등골이 휘도록 일만 해야 했던 그 기막힌 사연을 듣고, 툇마루 끝에 앉은 젊은 여자가 거무튀튀하니 검버섯이 피어오른 노파의 손을 잡았다.'“시어머니께서 구박하셨어요?”'“구박은 안 혔어. 어쩌다 내헌테 소가지야 쪼까 부렸제. 뭐, 차마 나가 미워서 그렸겄어? 그저 그놈의 지긋지긋한 가난이 죄제. 나가 자슥들 낳고 살아본께 알겄드만. 미느리 갸들 다 소용읍어. 에미 맘에야 제 새끼가 최고제. 암믄…….”'“할아버지랑 내내 같이 크다시피 하셨을 테니, 두 분의 정이 남다르겠어요?”'“정은 무신…… 우리 같은 사람들이 사랑을 아나, 정을 아나. 시어마이가 합방하라서 한 거고, 그리 배 맞추고 살다 본께 아들들 놓은 거고. 고냥고냥 마지못해 살아진 거제.”'노파가 멋쩍은 양 비시시 웃었다. 풀샷으로 처리된 마지막 정지화면에서 미소를 띤 주름진 얼굴이 성큼 다가섰다. 군데군데 치아가 빠져나간 공간이 사뭇 허허로우면서도 왠지 모를 정겨움이 느껴졌다.'“이로써 다섯 개의 후보작들을 다 본 것 같군요. 자, 이제 수상작을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휴우…… 이거 떨리는데요.”'항간에 제법 이름이 알려진 연기파 배우 조민식이 과장된 탄식을 발하자,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을 가득 메운 사람들 사이에서 유쾌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잠시 후 조금씩 사그라지는 웃음 그 너머로 한껏 고조된 민식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올해 다큐멘터리부문 수상작은 한국방송에서 제작한 <여자, 그 이름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의미>입니다. 우현주 피디, 진심으로 축하합니다.”'장내가 떠나갈 듯한 우렁찬 박수소리와 더불어 현주의 주위에서 축하인사가 쏟아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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