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주국(漢周國) 원화(元和) 17년 대흥성(大興城).'주작문(朱雀門) 종루에서 묘시(卯時)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동쪽 하늘에 계명성(啓明星)이 아직 선명한데 황궁은 일찍부터 분주했다. 외조에는 조정대신들이 입궐해 조회를 준비하고 내정은 오늘 있을 의례와 진연을 준비하기 위해 너나 할 것 없이 바빴다. 밤사이 고요했던 자애당(慈愛堂)에도 여인들이 들이닥쳤다. 들뜬 발소리가 향한 곳은 곧 후궁에 책봉될 소녀가 잠들어 있는 침실. 굳게 닫혀 있던 문을 열어젖힌 궁녀들과 시비들이 소녀의 침실이 제 방인 양 앞 다퉈 들어섰다. 팔을 걷어붙인 시비들이 욕통을 들여와 따뜻한 물에 향유를 붓는 사이, 궁녀들은 잠이 덜 깨어 눈을 비비는 소녀를 침상에서 끄집어내 옷을 벗기고 목욕통 속에 밀어 넣었다. 새벽에야 잠이 들었다가 억지로 목욕통 속에 들어앉은 소녀는 속눈썹에 졸음을 대롱대롱 달고 꾸벅꾸벅 졸았다. 머리를 감기던 궁녀들은 그 모습이 하도 천진하여 실눈을 뜨고 웃었다.'간신히 잠이 깬 소녀는 작게 하품을 하며 비교적 또렷해진 눈으로 주위를 살펴보았다. 붓꽃처럼 파란빛을 머금은 오색 주렴이 색색이 고운 빛깔을 토해내고 궁녀들의 부산한 장단에 맞춰 새들도 재잘재잘 지저귀고 있었다. 창마다 쳐진 비단 휘장, 비상하는 학이 그려진 녹나무 기둥과 윤기 자르르한 칠보 가구가 검소하게 자라온 소녀의 눈에는 생경하기만 하다. 소녀는 고개를 돌려 한쪽 벽을 차지한 병풍을 보았다. 부귀안락과 남녀화합을 상징한다는 모란도 속에 만개한 꽃 무리와 어지러이 춤추는 나비가 화원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여인들이라면 누구나 욕심 내어볼 만한 화사한 침실에서 궁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목욕을 하니 참으로 영화롭다 하겠으나 어린 소녀의 낯빛은 일말의 감흥도 없이 그늘져 있었다. 더욱이 귀하신 천자를 받들 광영을 앞두었으니 화사하게 피어도 모자람인데 소녀의 안색은 인적 드문 산길에 홀로 핀 제비꽃처럼 애잔하기만 했다.'“얼굴빛이 어둡습니다. 이렇게 좋은 날 웃으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