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객 여러분, 저는 기장입니다. 편안한 여행이 되셨습니까. 앞으로 약 5분 후에 목적지인 도쿄 나리타(成田) 국제공항에 도착하겠습니다. 비행기가 완전히 멈춘 후, 좌석벨트 사인이 꺼질 때까지 자리에서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현재 이곳 시각은 11시 30분입니다. 언제나 저희 ○○항공을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승무원들은 승객 여러분과의 또 다른 만남을 기대하며 한결같은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틀에 박힌 목소리를 들으며 혜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익숙하지 않은 기압변화로 귀가 아팠기 때문이었다.'한혜연. 2007년 현재 28세로 중앙박물관 학예사로 일하고 있는 그녀는 원래 일본사 담당인 이수련 학예사가 임신 8개월에 조산을 하는 바람에 이렇게 예정에도 없는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작년부터 북한유물 특별전 준비를 시작해 6개월 동안 휴일도 없이 뛰어다녀야 했지만, 은사이자 박물관장인 지성환 박사의 부탁을 받고 어쩔 수 없이 일본 도쿄대 역사학 교수이며 도쿄국립박물관 고문으로 있는 아키모토 히데오(秋本秀夫) 박사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아키모토 박사는 지성환 박사와 함께 임진왜란 때 남겨진 자료들을 조사하고 있었다. 조선에서 자행된 일본의 만행을 밝히고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아직까지 많이 남아 있었다. 왜란 때 조선을 유린했던 많은 왜장들의 기념관과 일본 역사에 고스란히 묻혀 침묵을 강요받고 있었을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