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드르륵…….'교실 문이 살며시 열렸지만 들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뭐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던 수민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애들의 반은 필기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그 나머지 반은 자거나 딴 짓 하느라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다시 필기를 하려고 칠판으로 고개를 돌리려는 그녀의 시선에 거북이마냥 바닥에 거의 붙어서 기어들어오는 사람이 보였다. 칠판에 영시를 적어가던 담임선생님도 낯선 인기척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려 바닥에 붙어있는 사람을 신기한 듯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그 정체불명의 사람도 시선을 느꼈는지 떨구고 있던 머리를 들어 선생님과 눈을 잠시 마주쳤다. 그러더니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했다. 갑작스럽고 황당한 상황에 한 손엔 책을 한 손엔 분필을 든 채 그대로 얼음처럼 굳어진 선생님을 뒤로 하고, 그 요상한 사람이 계속 그 자세로 엉금엉금 기어서 교실 뒤쪽으로 오기 시작했다. 그제야 필기하던 아이들이나 딴 짓 하던 아이들도 교실에 침입한 낯선 존재를 깨닫고는 작게 웅성거렸다. 그때 어디선가 분명히 기차화통을 삶아먹은 목소리가 교실 안에 울려 퍼졌다.'“형! 형 누나 왔어요!”'웬만하게 가는 귀 먹은 사람이라도 다 들릴만한 커다란 외침에 책상에 죽은 듯이 엎어져서 자고 있던 결의가 잔뜩 찌푸린 얼굴을 부스스 들며 주위를 느릿하게 둘러보았다. 자다가 머리를 책에 문대기라도 했는지 들쑥날쑥 여기저기 뻗친 머리카락을 제외하고는, 자다가 방금 깬 사람의 얼굴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그 수려함이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석고조각처럼 잘 깎여진 얼굴형 안에 잉크로 물들여놓은 듯 검고 숱 많은 눈썹과 속눈썹이 수묵화처럼 휘어져있었고, 너무 높지도 너무 낮지도 않은 코가 매끄럽고 시원스럽게 뻗어 적당한 길이의 인중을 사이에 둔 검붉은 입술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팔을 베고 자느라 눌려있던 한쪽 볼이 불그스름해진 것조차 일부러 분장이라도 한 건 아닐까하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결의의 얼굴에서 결점을 찾아내기란 거의 불가능해보였다. 짜증나는 듯 새까만 눈썹을 꿈틀대며, 짙고 긴 속눈썹에 둘러싸인 쌍꺼풀이 없는데도 꽤 커다란 두 눈을 치켜떴다. 교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동도 잠시 잊은 듯 모든 여학생들이 잠에서 깬 결의를 바라보며 한숨짓거나 얼굴을 붉히거나 가슴에 손을 얹었다.'여자들 중에서 유일하게 정신을 차리고 있던 수민은 여자애들의 과도한 반응에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 적게는 1년에서 많게는 2년 가까이 봐온 얼굴이 뭐가 새삼스러워서, 저런 넋 나간 표정들을 짓는 거지? 처음에 몰랐을 때는 그렇다 치지만, 저 박결의의 더럽고 제멋대로에다 포악하기까지 한 성격을 다들 아는 이 마당에도 여전히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이 그녀로서는 도저히 풀리지 않는 불가사의 중의 하나였다. 굳이 그 불가사의를 풀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 수민이었지만 말이다. 그녀는 시선을 돌려 박결의 누나라 명명된 여자가, 누나라고 했으니까 아마도 여자가 맞겠지, 바닥에서 일어서는 모습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머리카락은 전부 하나로 칭칭 올려 묶어 꼭 상투를 틀은 것 같았고, 평범한 체크무늬 셔츠위에 걸친 가죽 주머니 안에 꽂혀있는 망치 같은 연장들이 그녀를 역사서 속에 나오는 무사를 연상시켰다. 너무 작은 무사. 결의의 누라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두 사람의 외모는 판이하게 달랐다. 190cm가 넘는 결의에 비해 아주 작아보였는데 160cm의 자신보다도 더 작아보였다. 얼굴은 못생긴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예쁘게 생기지도 않은 무난하고 평범해 보이는 얼굴이라 컴퓨터 미남이라 불리는 결의와 남매라는 사실이 쉬 믿어지지는 않았다.'자신의 존재를 알려준 결의의 시다바리 중에 하나를 잠시 흘겨보다가 이내 동생에게로 눈길을 돌리는 그녀의 눈매가 참 매서워보였다. 이제 잠에서 완전히 깼는지 책상 속에 구겨 넣었던 긴 다리를 피며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선 결의의 눈매가 여자의 것과 닮아있었다. 말없이 서로를 죽일 듯 노려보는 남매에 의해 단체로 ‘얼음 땡’놀이라도 하는 듯 교실은 그대로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