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또 한번의 기회

프롤로그

''''' 따스한 봄바람이 막 병원을 나서는 여인을 감싸 안았다. 티 없이 맑고 깨끗한 유리문을 열고 나오는 여인의 얼굴은 화창한 계절과는 정 반대로 삭막하고 쓸쓸하기까지 했다. 파리한 얼굴로 다시금 자신이 나온 건물을 바라보는 여인의 뒷모습에는 아직도 버리지 못한 미련을 그곳에 남기고 온 것이 역력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부질없어. 역시 이건 잘못된 일인 거야.”' 한동안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는 가빈의 얼굴에는 서글픔이 가득 차올랐다. 그녀의 동공 속에는 부른 배를 자랑스레 내밀며 남편의 손을 붙잡고 병원 안으로 들어가는 여자들에 대한 부러움이 담뿍 묻어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납작한 배에 손을 얹는 가빈의 눈가에 곧 맑은 물이 가득 차올랐다. ' “돌아가자. 일단 돌아가서 생각해야만 해.”' 마치 줄로 매달려 움직이는 생명 없는 인형인 양, 가빈의 행동에는 전혀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지만 발걸음은 절로 익숙한 길을 따라가고 있는 것을 보면 사람의 습관이라는 것은 역시 무서운 것이다.' [야옹! 미야옹! 캬악!]' 몸은 이곳에 있으되 마음은 저 멀리 끝없이 날아가 있었던 가빈의 의식을 되돌린 것은 다름 아닌 날카로운 고양이의 울음소리 때문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소리가 울린 쪽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고양이 한 마리가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짓궂은 아이들에게 갈 길을 가로막힌 고양이는 몸을 곧추세운 채 좀처럼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그 고양이가 마치 자신인 것처럼 느껴져 가빈은 자신도 모르게 휘적휘적 그쪽을 향해 걸어갔다. ' “너희들, 그만 둬.”' 고양이를 노려보던 몇 쌍의 시선들이 모조리 가빈에게 향했다. 가빈은 자신을 명백한 침입자로 취급하는 아이들의 시선을 따갑게 느끼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조금 더 마음을 가라앉히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고양이를 자칫 잘못 건드리다가는 오히려 당할걸? 얼굴에 자국 나기 전에 어서 집에 가라.”' “이 고양이는 도둑고양이인데요. 아까 얘가 쓰레기 버리러 갔다가 쓰레기통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바람에 엄청 놀랐단 말이에요.”' 불만이 잔뜩 서린 항의에 가빈은 슬쩍 아이들의 표정을 살폈다. 꽤나 분했던지 아이들의 볼에 엷은 홍조가 물들어 있었다. ' “그냥 둬라. 날도 어두워졌는데 이만 집에 들어가고.”' “쳇!”' 마지못해 아이들이 돌아섰다. 가빈은 자신도 모르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아이들은 갔는데도 고양이가 자리를 뜨지 않고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동그란 눈동자가 꽤나 귀염성이 있어서 가빈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희한하게도 고양이는 그녀의 손길을 쉽사리 받아들였다. 가빈은 고양이의 턱을 살짝 간질였다.' “큰일 날 뻔했구나. 하긴 이 아파트 뒤가 산이라서 그런지 도둑고양이들이 많다고 하더니 너도 그 중 하나인가보지? 자, 가봐.”' [고마워, 인간.]' 고양이의 입이 벌어지나 싶더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가빈은 설마 하며 고양이를 바라보았다. 오늘 너무 충격이 커서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일까? 하지만 이미 주위는 어두워진 뒤였고, 가까운 곳에는 인기척조차 없었다.' “설마…… 그런 바보 같은 일이 벌어질 리가 없잖아. 고양이가 말을 하다니…….”' [난 고양이가 아니다, 인간. 하여간 신세를 졌다. 무엇을 바라나?]' 첫 번은 환청이라고 여길 수 있지만 두 번째는 다른 법이다. 가빈의 커다란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부릅떠졌다. 그녀는 고양이를 쓰다듬던 행동 그대로 굳은 채 입을 커다랗게 벌렸다.' “너, 너…… 정말 네가 말한 거니?”' [그래.]' “세상에! 고양이가 말을 하다니.”'' [나는 고양이가 아니다. 나는 캐트 시(Cait Sith)라는 요정이지. 본래 인간 세계에서는 일반 고양이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넌 날 구해주었고 주변에는 아무도 없으니 이번만큼은 원칙을 깨기로 했다.]' 가빈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휘둥그레진 눈으로 고양이의 면면을 살피기에 바빴다. 보통의 고양이보다 커다란 몸집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검은 털을 가진 말하는 고양이를 저녁 때 마주하자니, 보통 간담이 서늘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도망치려 해도 한번 굳어버린 몸은 도무지 펴질 줄 몰랐다.' [자, 그럼 답례를 해야지. 무엇을 바라지, 인간?]' “난, 나는…….”' 아라비안나이트의 지니는 들어 봤어도 소원을 들어주는 고양이는 또 처음이다. 고양이의 황금색 눈동자는 대답을 기다리는 듯 가빈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순간 가빈은 낮의 일이 생각났다. 부부가 사이좋게 산부인과를 드나들던 일. 두 번째 유산으로 인한 처참함이 애써 진정시켰던 내부를 붕괴시켰다.'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난 예전의 나로 돌아가고 싶어. 내 평생의 실수를 돌려놓을 수 있도록 말이야. 또……,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여자가 되고 싶지만…….” ' [좋아.]'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가슴 깊은 곳에서 곪아가던 상처를 드러낸 것에 놀란 가빈이 화들짝 놀랐을 때, 이미 고양이는 사라진 뒤였다. 어안이 벙벙해진 가빈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때마침 핸드폰이 열심히 울려댔다. 가빈은 습관적으로 폴더를 열었다.' - 나야. 오늘은 못 들어갈 것 같아. 혼자 있을 수 있지?' “물론이죠. 알았어요.”' 짧은 용건과 그에 따른 더욱 짤막한 답변. 가빈은 이미 끊어져 버린 핸드폰을 노려보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가 늦는 진실한 이유를 알고 있기에 더욱 숨이 답답했다. 더 이상 이렇게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사랑이라 생각했던 모든 것은 이미 허황된 신기루가 되어 산산이 부서진 이 이미 오래였다. ' “정말 그를 만나기 직전의 과거로 돌아갔으면 좋겠어. 할 수만 있다면 그런 어리석은 순정 따윈 애진작에 던져 버릴 수 있었을 텐데.”'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빛을 노려보는 가빈의 눈동자에는 원망과 한숨이 가득했다.''

미리보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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